# 3-1
“Your vision will become clear only when you can look into your own heart.
Who looks outside, dreams; who looks inside, awakes.”
“당신의 비전은 오직 자신의 심장을 들여다볼 때에만 선명해진다.
바깥을 바라보는 자는 꿈을 꾸고, 안을 바라보는 자는 깨어난다.”
- 카를 구스타프 융
인류는 아주 오래전부터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은 밤마다 같은 자리에서 떠오르고 사라졌고, 계절은 그 별들의 움직임과 함께 반복되었다. 인간은 그 규칙적인 흐름 속에서 씨앗을 뿌릴 시기를 알았고, 강의 범람과 바람의 방향을 예측할 수 있었다. 하늘을 관측하는 일은 곧 생존을 위한 지식이었고, 그 지식은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되었다.
결국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던 인간은 그것의 규칙성을 인식하며 시간의 감각을 터득했다. 또한 코스모스의 정교함과 질서정연함은 인간의 무의식에 그것을 모방하고자 하는 열망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초기 문명에서 하늘은 신들의 영역이었다. 번개와 폭풍, 해와 달의 움직임은 모두 초월적 존재의 의지로 이해되었고, 하늘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신성한 질서로 여겨졌다. 세계의 기원과 자연의 변화는 신화와 전설 속에서 설명되었다.
고대 그리스 지역의 사람들은 계절의 변화를 농업과 풍요의 여신 데메테르가 주관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의 딸 페르세포네는 지하세계의 왕 하데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존재였다. 하데스는 그런 페르세포네를 납치해 자신의 아내로 삼았고, 딸을 잃은 데메테르는 깊은 슬픔에 빠지게 된다.
데메테르는 농업의 여신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슬픔에 잠긴 동안 땅은 더 이상 열매를 맺지 못했고 곡식도 자라지 않았다. 이를 지켜본 신들의 왕 제우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페르세포네를 지상으로 돌려보내려 했지만, 페르세포네가 저승에서 석류를 먹었기 때문에 완전히 지상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결국 1년 중 일부 기간 동안 데메테르는 딸 페르세포네와 함께 지상에서 지내는 것으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기간은 데메테르가 기뻐하는 시기인 봄과 여름이 되었고, 페르세포네가 저승에 있는 기간은 데메테르가 슬퍼하는 시기인 가을과 겨울이 되었다.
위 내용이 그리스·로마 신화 속 계절의 변화에 대한 설명이다. 즉 당시 사람들에게 계절의 변화는 신들의 감정으로 설명되었다.
실제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 이야기를 얼마나 믿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올 만큼 무척 흥미로운 이야기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오늘을 사는 우리는 이 이야기가 계절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고 있다. 이미 2차 인지혁명을 겪은 우리의 의식은 수와 논리, 즉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이야기라면 쉽게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그러한 세계관 속에서도 새로운 질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자연의 현상은 정말 신들의 변덕에 의해 움직이는 것일까. 아니면 그 안에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어떤 원리가 존재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 질문이 등장한 곳은 흥미롭게도 위의 재미난 신화 이야기가 만들어진 곳과 같은 지역이었다.
이 질문이 처음으로 명확한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곳이 바로 고대 그리스였다. 기원전 6세기 무렵, 소아시아의 밀레토스에서 활동하던 사상가 ‘탈레스’는 자연 현상을 신화적·종교적 설명에 의존하던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 이성적 탐구와 관찰을 통해 설명하고자 한 최초의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세상의 근원적인 원리에 대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서양 철학과 과학의 문을 동시에 열어젖힌 인물이기도 하다.
탈레스는 세계의 근원을 물이라고 주장했다. 오늘날의 기준에서 보면 이 설명은 엉터리 과학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주장의 의미를 정확성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탈레스는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신화를 호출하지 않은 최초의 인물이었고, 자연 속에서 자연의 원리를 찾으려 했던 지식의 선구자였던 셈이다.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철학(philosophia,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단어를 만들고 스스로를 ‘철학자(philosophos,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라 칭한 최초의 인물은 피타고라스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 탈레스가 ‘최초의 철학자’라 불리는 이유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를 자연철학의 창시자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탈레스가 자연의 원리를 찾으려 했던 시도는 이후 여러 사상가들에 의해 이어졌다. 탈레스의 제자였던 아낙시만드로스는 세계의 근원을 특정한 물질이 아니라 ‘아페이론(apeiron)’이라 불리는 무한한 원리로 설명하려 했다. 또 다른 사상가인 피타고라스는 세계가 수와 비율, 조화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에게 우주는 혼란스러운 사건들의 집합이 아니라 일정한 구조와 질서를 가진 체계였다.
바로 이 지점에서 중요한 개념이 등장한다. 그것이 바로 ‘코스모스’였다. 고대 그리스어에서 코스모스는 단순히 우주를 의미하지 않았고, ‘질서’, ‘조화’, ‘정돈된 구조’를 뜻하는 말이었다. ‘코스모스’라는 단어의 의미를 보아도 당대의 그리스 철학자들이 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들에게 우주는 혼돈이 아니라 질서였고, 이해할 수 없는 신비가 아니라 탐구할 수 있는 구조였던 것이다.
이러한 자연철학자들의 사유는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자연은 더 이상 신들의 영역이 아니라 질문과 탐구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인간은 처음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하나의 체계로 이해하려 하기 시작했다.
‘코스모스’는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에서 등장한 개념이었다. 그 자연철학이 오늘날의 철학과 과학으로 분화되었으니, 과학뿐 아니라 철학 또한 코스모스에서 피어난 학문이라는 말이 온전히 성립되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철학자들의 사유와 자연철학이라는 학문의 출현은 단순히 지식을 연구하는 것을 넘어 더 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인간은 자연철학을 통해 우주의 구조를 이해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그 구조 속에서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지를 묻게 되었다.
따라서 철학의 질문은 코스모스에 대한 질문이었으며 동시에 인간에 대한 질문이었다.
“세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자연은 어떤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가.”
“그리고 그 질서 속에서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이러한 질문들이 이어지며 인간은 코스모스와 함께 스스로를 사유하기 시작했다. 우주의 질서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곧 그 질서를 설명하려는 철학이 되었고, 그 철학은 다시 인간의 삶과 윤리를 설명하려는 사유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코스모스를 이해하려는 질문은 결국 인간 자신에게 돌아왔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의 사유는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철학은 무엇을 배우기 위한 학문인가?”라고 물었을 때,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쉽게 떠오르지는 않는다. 철학은 세계와 인간에 대한 질문과 탐구 위주의 학문이다 보니, 눈에 보이는 모든 것, 심지어 보이지 않는 것조차 철학의 대상이 된다.
그렇기에 철학은 지구상의 거의 모든 학문과 그 뿌리가 맞닿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이 알고자 하는 본질적인 한 가지’를 묻는다면, 개인적으로는 “인간”이라고 답하고 싶다.
고대 그리스의 한 철학자는 자연의 근원을 탐구하던 기존의 철학적 관심을 인간의 삶과 윤리로 돌려놓았다. 그는 “세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라는 질문보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 인물이 바로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소크라테스'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연의 구성 원리를 설명하는 대신 인간의 삶과 덕, 정의, 지혜와 같은 문제를 끊임없이 질문했다. 그는 스스로를 지식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그의 질문 방식에 대해서는 이전에 썼던 책 《배움의 존재》에서 소개했던 내용을 인용해 보겠다.
기원전 5세기경, 당신이 아테네의 시장에서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을 마주치게 되었다면, 과연 어떻게 했을까?
그의 사상에 감명을 받았다는 인사말과 함께 반가움을 드러냈을까?
아니면 "저는 당신의 열렬한 팬이에요"라며 그의 저서(사실, 소크라테스는 저서를 남기지 않았다)를 내밀고 사인을 요청했을까?
조심스럽게 예측해보건대, 아마도 당신은 그를 모른 체하거나, 그의 시선을 피해 도망치기 바빴을지도 모른다.
일반인의 시선으로 보면 소크라테스는 꽤나 기이한 인물이었다. 특정한 직업도 없는 한 사람이 제자들을 이끌고 다니며, 마주치는 사람마다 알 수 없는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아무리 능수능란한 달변가라 해도, 소크라테스의 질문을 이겨내기는 쉽지 않았다. 그는 상대의 답변 속에 숨어 있는 개념들을 더욱 깊이 파고들며, 결국 하나의 고백을 이끌어내고야 말았다.
“나는 무지한 사람입니다.”
그는 가난한 장인, 정치인, 시인 등 다양한 사람들을 직접 만나 질문을 던지고, 그들의 논리적 모순을 드러내며 진정한 지식에 다가가려 했다. 그리고 문답법(산파법)이라 불리는 이러한 묻고 답하는 방식을 통해 당대의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기도 했다.
어찌 보면, 소크라테스는 만나는 사람마다 무지를 일깨우는 불편한 질문을 던지던 거리의 기피 대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를 ‘거리의 철학자’, ‘영혼의 산파’라 부르며 존경을 표했니, 그의 질문은 단지 불편한 것에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는게 분명해 보인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자각과 사유의 감동을 안겨주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유는, 단지 그가 사용한 철학적 방식 때문만은 아니다.
철학의 기원은 기원전 6세기, 고대 그리스 이오니아 지방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과학과 수학이 시작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 이곳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사유 중심지였다. 이곳에서 탈레스, 피타고라스와 같은 철학자들이 인간의 이성(Logos)을 일깨우기 시작했다. 그들은 인간의 이성을 통해 자연의 원리를 설명하려 했기 때문에, ‘자연철학자’라고도 불린다.
당시 철학의 주요 관심은 ‘자연’이었다. 하지만 이 사유의 패러다임을 전환시킨 인물이 있었으니, 그 인물이 바로 소크라테스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의 관심을 ‘자연’에서 ‘인간’으로, ‘세계의 원리’에서 ‘삶의 의미’로 옮겨놓았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이 “세상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를 묻는 데 집중했다면, 그 이후의 철학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중심에 두기 시작한 것이다.
소크라테스 철학의 핵심에는 실천 중심의 인간 성찰이 있다. 그는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고, 윤리적으로 살아가려는 성찰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중심에 자리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쉽게 말해,
“나는 내가 무지하다는 것을 안다.”
라고 말함으로써, 인간이 진정한 배움의 시작을 선언하며,
“선을 아는 사람은 악을 행할 수 없다.”
라는 말과 같이, 진정한 배움이 윤리적 행동의 결과, 즉 실천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다시말해, 그에게 배움이란 단순한 정보 습득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윤리적 탐색이었다.
이처럼 소크라테스는 철학의 방향을 인간으로 돌려놓았다. 물론 그 이후로 자연철학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후대의 많은 철학자의 사유가 그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제자였던 플라톤은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이데아’를 사유했고, 다시 그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과 인간, 윤리와 정치에 이르기까지 세계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려 했다.
소크라테스의 철학 안에 담겨 있던 ‘윤리와 도덕’은 많은 사람들의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그 흐름 속에서 철학은 단순히 우주의 구조를 설명하는 학문을 넘어,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학문이 되었다.
어쩌면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코스모스를 향한 사유를 시작했던 초기의 ‘자연철학’과 거리가 멀어 보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철학을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이성을 통해 존재의 원리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그 본질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소크라테스는 앎의 실천을 중요하게 여겼고, 또한 그것을 몸소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어쩌면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보다도 더 깊은 층위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이 세상을 움직이는 질서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까.”
고대 그리스인들이 코스모스를 바라보며 던진 위와 같은 질문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지혜를 탐구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질문은 다시 코스모스를 향한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인간은 우주의 질서 속에서 어떤 존재이며, 코스모스의 질서를 이해한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이 질문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에게서 시작되었지만,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여전히 코스모스를 바라보고 있으며, 동시에 그 속에서 인간의 길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코스모스에서 시작되어 소크라테스를 거쳐 우리에게 전해진 ‘철학’이라는 학문은 아직 끝나지 않은 여정을 걸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