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1)
“Act, so that the effects of your action are compatible with the permanence of genuine human life on Earth.”
“행위하라, 그 행위의 결과가 지구 위에서의 진정한 인간 삶의 지속과 양립할 수 있도록.”
- 한스 요나스, 《책임의 원칙》 (1979)
도덕이라는 가치는 여전히 우리의 삶 속에서 쉽게 무시되곤 한다. 오늘날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와 개인주의, 그리고 합리성의 영역은 우리의 삶에서 도덕과 윤리의 가치를 점점 희미하게 만들고 있다.
이는 오늘날 사회가 인간을 바라보는 방식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한 사람의 삶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이 소유한 물질이나 성취한 결과물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만, 그 사람이 지닌 도덕적 가치관이나 윤리의식에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는다.
내가 선을 행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면, 어떤 수학적 계산이나 논리를 적용해 보더라도 ‘선을 행하는 행위’ 자체가 나에게 직접적인 이득을 가져다주는 경우는 거의 없어 보인다. 실상이 그러하니 개인주의와 합리성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개인의 성찰은 쉽게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코스모스를 위한 윤리 또한 마찬가지다. 내가 이곳에서 아무리 “코스모스의 회복을 위해 철학과 윤리를 되찾아야 한다.”라고 주장하더라도, “그것이 지금의 나에게 과연 어떤 이득을 가져다주는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그 가치를 잃어버리기 쉽다.
속상한 일이지만,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니체는 이러한 우리에게,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고 초인으로 나아갈 것을 제시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따르고 있는 가치가 당신을 상승시키고 있는가?
이 질문은 오늘의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해보자.
개인주의와 합리성은 나라는 존재를 더 나은 존재로 만들어 주고 있는가.
나아가, 우리를 더 나은 존재로 이끌고 있는가.
만약 이 질문에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없다면,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오늘날의 가치가 과연 타당한 것인지 다시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니체의 선언은 분명 고정된 가치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켰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어떤 기준을 새롭게 세워야 하는가.”라는 새로운 문제를 남겼다.
가치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무가치한 기준을 세우거나, 제한 없는 파괴로 이어질 위험 또한 내포하고 있다.
그렇기에 여기서 다시 한 번 철학을 불러오고자 한다.
이번에 소개할 철학은, 오늘날 우리 자신을 가장 직접적으로 비추는 현대 철학이다.
과거의 인간은 자연 앞에서 무력한 존재에 가까웠다. 자연은 인간이 거스를 수 없는 질서였고, 인간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였다.
그러나 과학의 발전과 산업혁명 이후, 인간이 만들어낸 기술은 이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이제 인간은 자연을 해석하는 존재를 넘어, 자연을 변형하고 재구성하는 존재가 되었다. 우리는 생명을 설계하고, 환경을 바꾸며, 지구 전체의 균형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잠시 우리가 지금까지 지구에 가한 변화를 되짚어보자.
우리는 대부분의 강을 댐으로 바꾸거나 필요에 따라 방류했고, 육지의 3분의 1을 취향에 맞게 변화시켰다. 물고기를 남획하고 사냥을 남용하며, 종의 멸종을 가속화했다. 오늘날 육지 포유동물의 바이오매스(생물 유기체에 속하는 모든 종) 중 3퍼센트 만이 야생의 동물이고, 그 나머지는 인간, 가축, 반려동물이다. 이처럼 종의 다양성을 극단적으로 감소시킨 우리 인간은 그 자신도 멸종을 향해 달려나가고 있다.
지구에는 다섯 번의 대멸종이 있었다. 그중 약 2억 5,200만 년 전, 고생대 페름기 말에 발생한 대멸종은 지구 생물의 대부분을 사라지게 만든 사건이었다. 당시 생물종의 약 95% 이상이 사라졌으며, 이 사건은 흔히 ‘모든 대멸종의 어머니’로 불린다.
이 대멸종의 주요 원인으로는 온실가스의 대량 방출에 따른 급격한 기후 변화, 해양 산소 고갈, 그리고 해양 산성화가 지목된다.
그런데 어딘가 익숙하게 들려오는 모습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 변화의 양상과 구조적으로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한 유사성보다 더 중요한 차이가 있다.
페름기 당시의 온실가스 방출은 수만 년에서 수십만 년에 걸쳐 진행된 반면, 오늘날의 온난화는 산업화 이후 불과 수백 년, 그중에서도 최근 수십 년 사이에 급격히 진행되었다. 즉, 변화의 방향만이 아니라 그 속도 또한 전례 없이 빠르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환경 문제가 아니라, 장기적이고 전지구적이며 되돌리기 어려운 성격을 지닌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거나 외면하는 사이, 그 영향은 점진적으로 축적되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대멸종을 눈앞에 둔 멸종위기 종이며, ‘모든 대멸종의 신’이라고 불릴만한 새로운 대멸종의 창조자가 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를 인식한 한 철학자는 오늘날의 인간에게 걸맞은 새로운 윤리를 고민한다.
한스 요나스는 독일태생 유대인 철학자로서, 우리에게 별로 친숙한 철학자는 아니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저자로 유명한 ‘한나 아렌트’와 헷갈려 하는 사람들도 종종 보인다.
실제로 두 사람의 공통점이 존재하기는 하다. 두 사람 모두 독일태생의 유대인이었고, 두 사람 다 인간의 ‘책임’에 대해 주목했다.
한나 아렌트의 책임에 대한 논의는 6백만명의 유대인 학살의 실무 총책임자 위치에 있었던 인물인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 분석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녀는 여기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유명한 개념을 제시했다.
이야기의 핵심은 학살의 책임자였던 아이히만은 결코 괴물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생각하지 않는 평범한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실제 재판에서 자신은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악의 평범성’의 결론은 명확했다. ‘생각없음(thoughtlessness)’ 자체가 책임 회피의 근원이었다.
즉, 그녀가 제시한 핵심 명제는 ‘인간은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책임을 진다.’라는 것이다. 다시말해, 책임의 작동 방식에는 스스로 그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생각’이 동반되어야만 했다.
따라서 책임은 법이나 규범의 문제가 아니라, 칸트가 말했던 “나는 이것을 해도 되는가?”를 스스로 묻는 능력에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책임은 니체가 말했던 ‘스스로 따라야 하는 가치를 창조하는 것’과도 닮아있었다.
한편, 한스 요나스가 제시한 ‘책임의 원칙’은 이것에서 한단계 더 나아간다.
그는 ‘책임’ 자체가 현대 윤리의 근간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요나스가 보기엔 전통 윤리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 특성을 갖고 있었다.
첫째, 인간의 행위 영향은 비교적 좁고 단기적이었다는 점,
둘째, 행위의 결과가 대체로 가까운 타인과 현재 사회 안에서 드러난다는 점,
셋째, 자연 자체는 인간 행위로 근본적으로 파괴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인 윤리의 특성은 현대의 기술문명과 인간 삶의 지속성을 온전하게 지탱해 줄 수 없었다. 인간이 만든 핵무기나 생명공학, 산업 시스템, 환경 파괴 능력들은 이제 장기적이고 전지구적이며 되돌리기 어려운 결과를 낳을 수 있었고, 전통적인 윤리는 그러한 시대속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고있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전통적인 윤리는 주로 ‘현재의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다루었다. ‘거짓말을 하지 말라’, ‘타인을 해치지 말라’, ‘약자를 배려하라’와 같은 규범들은 대체로 지금 이 순간, 서로 마주보고 있는 인간들 사이의 행위를 기준으로 삼는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의 행위는 지금 여기의 타인뿐만 아니라,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인간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그 영향은 단순한 불편이나 손해를 넘어, 존재 자체를 위협할 수 있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가 제시한 새로운 윤리가 바로 ‘책임’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책임은 단순히 자신의 행동에 대한 결과를 감수하는 수준의 의미를 넘어 그것은 훨씬 더 근본적인 것을 바라고 있었다. 바로, “현재의 우리는 미래를 고려해야만 한다.”라는 요구였다.
요나스는 인간의 행위가 가져올 장기적 결과를 윤리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고 보았다. 즉, 지금의 선택이 미래의 생명과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행위하라, 그 행위의 결과가 지구 위에서의 진정한 인간 삶의 지속과 양립할 수 있도록.”
요나스가 선언한 이 명령은 ‘조건없는 보편적 선(善)을 위한 윤리’라는 점에서 칸트의 정언명령과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그 방향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칸트가 ‘현재의 보편화 가능한 행위’를 기준으로 삼았다면, 요나스의 시선은 그보다 훨씬 더 멀리있을지 모르는 ‘미래’를 향해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윤리의 범위가 ‘현재’에서 ‘미래’로 확장되었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 확장은 단순한 시간적 확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 가진 힘의 크기가 변했기 때문에, 그 힘에 걸맞은 윤리 또한 필요해졌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능력이 확장된 우리에게는 더 큰 책임이 요구되고 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