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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인지력에 대해 이야기했으면 우리가 맞이해야 할 인지혁명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교육이나 배움을 통해 우리는 인지력의 향상을 겪는다. 다만 이것은 기존 인식에 대한 재편이라기보다는, 이전에는 약하게 인지했던 것에 대한 강화에 가깝다.
예를 들어 1차 인지혁명을 통해 우리는 종교나 신화와 같은 것들을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을 터득했다. 이는 아마 개개인의 믿음, 신앙과 같은 요소를 만들어내는 데에 작용했을 것이다. 그 이후 과학혁명 시기, 2차 인지혁명을 겪으며 우리의 인식은 이성과 논리를 우리 의식의 중심축으로 작용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이전의 우리에게 이성과 논리라는 개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2차 인지혁명 이후에도 종교와 신앙, 그리고 추상의 세계에 대한 인식이 사라졌던 것도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기존의 인지력과 중첩되어 함께 작용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는 위와 같은 것들을 동시에 인지하고 내면에서 서로를 저울질해 볼 수 있다. 이를테면 단군설화와 같은 신화적 이야기를 인지할 수 있으면서도, 이를 이성과 논리의 시선으로 재해석하지 않으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3차 인지혁명은 여기에 어떤 것을 더하는 것일까?
우리는 그 답을 이미 알고 있다.
이제 우리 의식의 중심에 ‘윤리’라는 개념이 추가되어야 한다.
하지만 3차 인지혁명에서 말하는 윤리는 단순히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수준의 도덕적 권고를 하고자 함이 아니다. ‘윤리’ 그 자체가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무언가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나는/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옳은 것인가.”라는 성찰의 물음이 습관처럼 떠오르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
즉, 인식 단계에서 우리의 의식이 ‘윤리적 맥락’을 고려하는 것이다. 이것이 ‘윤리적 감수성’이며, 3차 인지혁명을 통해 향상시켜야 할 핵심적 역량이다.
이제 위에서 말했던 ‘성인지 감수성’에 대해 다시한번 떠올려보자. 성인지 감수성은 교육에 의해 훈련될 수 있는 능력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 변화는 느리지만 분명히 나타나고 있었고, 상호 보완적으로 점진적 향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윤리적 감수성’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는 교육과 배움을 통해 향상될 수 있는 능력이며, 그것을 가르치고 실천하는 주체들 사이에 향상 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리고 어쩌면 성인지 감수성 보다도 교육을 행하기에 더욱 수월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윤리적 감수성을 위한 교육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그 교재또한 이미 충분히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철학과 그것에 포함된 윤리와 도덕은 우리에게 전혀 생소한 개념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식에 윤리가 중첩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 변화는 거창한 선언이나 극적인 전환과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마주했을 때, 그 선택의 결과를 단순히 ‘가능한가’가 아니라 ‘옳은가’의 기준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성과 논리,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시작된 과학과 기술은 우리에게 수많은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덕분에 현대의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이미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3차 인지혁명이 요구하는 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질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해도 되는가?”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이것을 사용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제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택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질문이될 수 있다. 문명의 발전 방향을 더욱 안정되고 온전한 곳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윤리가 인지의 중심으로 작동하기 시작하면, 우리의 판단 방식 자체가 달라진다. 과학기술은 더 이상 단순한 도구로 남지 않고, 그 사용의 결과까지 함께 고려되는 대상이 된다. 개개인의 선택은 더 이상 개인의 이익이나 효율성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그 선택이 만들어낼 파장과 영향을 함께 포함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인간은 비로소 ‘결과를 감당하는 존재’가 된다. 한스 요나스가 말한 ‘책임’이 발현되는 인간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감수성의 향상은 의식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 그 향상은 교육과 배움을 통해 뿌리를 내릴 수 있으며, 그 열매는 인류의 인식의 방향을 변화시키고,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개인의 차원을 넘어 문명 전체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
어쩌면 철학이 추구해 왔던 것은 항상 이러한 인류 문명의 성찰과 진보였고, 코스모스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우리에게 그것을 알려주고 있었던 것일 수 있다. 철학의 뿌리도 결국 코스모스를 향했던 시선에 있었던 것이니 말이다.
속도와 효율을 최우선으로 삼았던 문명은 이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우리가 가고 있는 이 방향은 과연 지속 가능한가.”
“우리는 어떤 가치를 최우선에 두고 행동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이 반복되고, 그것이 습관이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단계의 문명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그 문명의 중심에는 언제나 하나의 기준이 자리 잡고 있다.
철학과 윤리라는 이름의 기준이 말이다.
이제는 정말로 항해의 방향, 문명 설계의 방향을 설정해야 할 때에 이르렀다.
우리는 코스모스를 향해 계속해서 노를 저어간다.
그 코스모스는 이제 단순히 광활하고 찬란한 우주 공간만을 의미하는 것에서 벗어났다. 그것은 훨씬 더 깊고 근본적인 무언가, 이 세계를 이루는 원리이자 근원이며, 진정한 조화의 원칙을 담고 있는 곳이다.
우리가 가진 상상하는 능력이 그 항해를 꿈꾸게 만들었고, 이성적 사고가 그 항해를 실행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면, 이제는 그 항해를 완성시킬 차례이다.
이제 정말, 본격적으로 코스모스를 꿈꾸어보기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