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약이야기
직무관련 회보서 원고 제출을 준비하다가, 오랜만에 본업과 관련된 알쓸잡상(알아도 쓸모없는 잡다한 상식)을 써보는 것도 색다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작성한 글입니다.
자체적인 보안성 검토를 완료하였으며, 군사상 비밀성 내용이 없다는 점, 국방 정책과 상이한 내용이 없다는 점, 군 비하 및 사기저하 등 대군신뢰에 악영향을 미치는 내용이 없다는 점을 근거로 이 글이 대외 공개가 가능한 글이라는 사실을 통보하는 바입니다.(ㅎ)
포탄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형태는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은 내부에 고성능 폭약이 가득 찬 K-9 자주포용 탄약이나, K-2 소총에 사용하는 유선형의 탄두 모양을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
또는 어릴 적 <날아라 슈퍼보드>를 재미있게 보았던 세대라면 저팔계가 쏘던 바주카 포탄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존하는 가장 높은 관통력(장애물이나 장갑을 관통하는 능력)을 가진 전차 탄약의 형태를 보면 그 모습은 다소 생소하게 보인다. 커다란 직경을 가진 포에서 발사된 탄약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길고 가느다란 화살과 같은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그 끝에는 작은 날개가 달려 있다.
이 탄약이 이러한 형태를 갖추게 된 데에는 꽤나 긴 역사가 담겨 있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던 1916년, 프랑스 솜강 유역에서 우렁찬 굉음과 함께 철조망과 진흙밭을 뚫고 등장한 전차는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1차 세계대전 당시만 해도 탄약의 형태는 비교적 단순했다. 소총에서 발사되는 소구경 탄환은 오늘날과 비교해도 그 형태가 거의 동일하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총구의 강선을 따라 회전하는 탄두는 안정적인 비행 능력을 확보했고, 이를 통해 먼 거리의 적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었다.
포병 탄약의 경우에도 그 파괴력과 사거리는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탄약의 작동 원리와 구조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총탄을 퍼부어도 제압할 수 없었던 전차의 등장은 전쟁의 양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전차의 등장으로 인해 탄약은 단순한 대인 살상이나 포격의 용도를 넘어, 새로운 능력을 요구받게 된다.
그것은 바로 장갑화된 대상을 관통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전차라는 방패의 등장과 함께 탄약은 이를 뚫기 위해 변화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어낼 수 있는 가장 간단하고도 확실한 방법은 ‘힘으로 뚫어내는 것’이었다.
즉, 운동에너지를 증가시켜 두꺼운 강철판(장갑)을 관통한다는 개념이었다.
이렇게 장갑을 관통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운동에너지를 지닌 탄약을 徹(뚫을 철)에 甲(갑옷 갑)을 써서 ‘철갑탄’이라 불렀다.
탄두가 강력한 운동에너지를 지니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바로 탄두의 무게(질량)와 속도이다.
초기의 철갑탄은 탄두의 질량을 늘리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운동에너지 공식(E=1/2mv²)에 따르면 탄두의 질량이 증가할수록 운동에너지는 커진다. 탄두의 질량이 증가하면 직경도 자연스럽게 커지고, 이를 밀어내기 위한 추진장약(화포 내부에서 포탄을 밀어내는 화약)의 양도 함께 증가하게 된다. 또한 더 크고 무거워진 탄두와 높은 압력을 견디기 위해 화포 자체도 점점 대형화되었고, 그 결과 대전차포와 같은 대구경 직사화기가 발달하게 되었다.
하지만 단순히 탄두의 무게만 증가시키는 방식은 한계가 있었다. 직경이 커진 탄두는 공기저항이 증가하여 운동에너지 손실이 커졌기 때문이다. 반대로 탄두를 지나치게 뾰족하게 만들면 길이가 과도하게 길어져 비행 안정성이 떨어지고, 장갑에 충돌할 때 탄두가 파손되거나, 접촉 면적이 작아 입사각이 클경우 미끄러지며 튕겨 나가는 현상(도탄)이 발생할 가능성도 커졌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구진들은 새로운 방식을 고안했다.
그것은 탄두에 뭉개지기 쉬운 ‘모자’를 씌우는 것이었다.
이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방식은 공기저항을 줄이고 비행 성능을 개선하는 데 기여했으며, 이렇게 발전한 탄약은 ‘철갑모탄(Armor-Piercing Capped, APC)’ 또는 ‘초고속 철갑탄(High Velocity Armor Piercing, HVAP)’이라 불리게 되었다.
아직 뭔가 부족했다. 적 전차의 장갑은 나날이 두꺼워졌고, 신소재 복합장갑은 가벼우면서도 튼튼한 방호력을 자랑했다. 대전차고폭탄(High-explosive anti-tank, HEAT)이라는 화학에너지 탄약의 등장은 탄두의 운동에너지와 관계없이 효과적으로 전차의 장갑을 관통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지만, 전차의 반응장갑이나 공간장갑 앞에서는 그 효과가 감소되었다. 심지어 탄두의 속도가 느린 대전차고폭탄은 전차의 능동형 방호체계에 표적이 되기 일쑤였다.
결국 전차가 전차를 격파하기 위해선 여전히 빠르고 강력한 탄두가 필요했다.
이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물리학이었다. 다시 운동에너지로 돌아와 보자.
운동에너지 공식(E=1/2mv²)에 따르면 운동에너지는 질량과 속도의 제곱에 비례한다. 다시 말해, 질량이 두 배 늘어나면 운동에너지도 두 배로 늘어나지만, 속도가 두 배 늘어나면 운동에너지는 그 제곱인 네 배로 증가한다.
즉, 탄두의 질량을 늘리는 것보다 속도를 늘리는 것이 운동에너지 확보에 훨씬 중요한 요소가 된다.
하지만 속도를 늘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공기역학적으로 초기 속도를 확보하고 공기저항을 줄이기 위해서는 탄두를 가늘고 길게 만드는 방법이 있지만, 이는 앞서 언급한 탄두의 파손과 도탄을 유발한다.
길어진 탄두의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날개를 달아 비행 안정성을 확보하는 방법도 고려될 수 있었지만, 회전하는 탄두에 날개를 다는 것은 비행 효율을 오히려 떨어뜨린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다. 탄두를 회전시키지 않으면 된다. 그렇게 강선이 없는 포신인 ‘활강포’가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탄두와 포강(포신 내부) 사이에 빈 공간이 없어야 추진장약의 연소 압력을 온전히 전달받을 수 있다.
하지만 탄두가 가늘어져 포강의 직경보다 작아지게 되면 약실내 추진장약의 연소시 발생하는 가스압력을 온전히 전달 받을 수 없다.
그렇다고 포의 구경을 줄이게 되면 다양한 탄종을 운용할 수 없어, 변수가 많은 전장에서 효율이 떨어진다.
탄약을 연구하던 이들은 포의 구경은 유지하면서도 탄두를 길고 가늘게 만드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여기서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발사 시에는 탄두의 직경이 포강에 맞닿을 만큼 크지만, 발사 후에는 직경이 작아지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연구진들은 극도로 빠르고 비행 성능이 뛰어난 화살 형태의 관통자에 샤보트(Sabot)라는 부품을 덧붙였다.
발사 순간, 샤보트와 관통자는 하나의 탄두처럼 포신 내부를 이동하며 추진장약의 가스 압력을 전달받는다. 그리고 탄두가 포신을 빠져나오는 순간 변화가 일어난다. 공기저항에 의해 관통자를 둘러싸고 있던 샤보트가 분리되면서, 관통자의 불필요한 질량이 제거되고 높은 속도를 유지한 채 비행을 이어간다. 또한 공기저항을 적게 받는 형태이기 때문에 기존 탄두보다 운동에너지 손실이 훨씬 적은 상태로 표적에 도달한다.
이때 가느다란 관통자의 에너지가 전차 장갑의 좁은 면적에 집중되면서 매우 높은 관통력을 발휘하게 된다.
이렇게 등장한 날개안정샤보트분리형철갑탄(APFSDS)은 운동에너지 탄약의 새로운 기준이 되었다. (이를 줄여 ‘날탄’ 또는 ‘날개안정철갑탄’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는 실제 전장에서 그 효과가 입증되었다. 걸프 전쟁 당시 미군의 M1 에이브람스 전차에서 발사된 날탄 한 발이 T-55 전차 두 대를 연속으로 관통한 사례가 보고되었다.
탄약 한 발로 두 대의 전차를 꿰뚫어버린 것이다!
전차와 탄약의 발전사는 결국 ‘방패와 창의 경쟁’의 역사였다. 두꺼워지는 장갑에 대응하기 위해 탄약은 더 강해져야 했고, 그 과정에서 탄약은 단순한 폭발력이 아닌 물리 법칙 그 자체를 활용하게 되었다.
운동에너지의 관점에서 본다면, 관통력은 질량보다 속도에 더 크게 의존한다. 그리고 이 단순한 사실이 탄약의 형태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탄두는 더 이상 둔하고 무거운 덩어리가 아니라, 빠르고 길며 가느다란 형태로 진화하게 되었고, 회전 대신 날개로 안정성을 확보하는 방식이 선택되었다. 또한 샤보트를 이용해 발사 효율과 비행 효율을 동시에 확보하는 구조가 도입되면서, 탄약은 하나의 정교한 물리 시스템으로 완성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결과로 등장한 날개안정샤보트분리형철갑탄(APFSDS)은, 단순히 강한 탄약이 아니라 '에너지를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에 가까운 존재라 할 수 있다. 이는 폭발이 아닌 속도와 집중을 통해 장갑을 관통하는, 물리학적 최적화의 산물이었다.
결국 현대 전차의 주포에서 발사되는 이 가느다란 관통자는, 가장 단순한 원리에서 출발한 가장 정교한 무기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포탄의 상식을 깨고 ‘창’으로서 전장을 지배하는 탄약이 되었다.
아마 없을 것 같지만, 언제나 질문은 환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