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가마솥에 <논어>를 넣고 팔팔 끓이고 졸여라.

- 이황에서 이육사로

by 이채이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 이육사의 <광야> 중에서


시인 이육사는 퇴계 이황 선생의 14대 후손이다. 그가 시 <광야>를 통해 이처럼 결연하고 단호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데에는, 가문에 흐르는 정신의 유산이 분명 한몫했을 것이다. 시 속에서 느껴지는 그 소름 끼치는 결연함은 단지 개인적 감정의 고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 철학의 맥을 잇는 역사적 울림이며, 정신적 유산의 계승이다.

이육사는 <광야>에서 천고의 시간이 지난 뒤에 백마를 타고 나타날지도 모를 초인을 기다리며, ‘가난한 노래의 씨앗’을 뿌린다. 나는 이 대목에서 ‘초인’보다는 ‘씨앗’이라는 표현에 더 깊이 끌린다. 이 정신적 유산을 찾아 거슬러 가보자.


씨앗. 곧 인(仁)이다. 공자의 사상을 모아 엮은 책 『논어』의 중심에는 바로 이 ‘인'이라는 글자가 있다.

『논어』에서 ‘인(仁)’을 지워버리면 책 전체가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이 글자는 단순히 ‘어질다’는 뜻의 한자어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본질이 인간에게서 비롯된다”는 사유의 씨앗이다.

최진석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커다란 가마솥에 『논어』를 넣고
팔팔 끓이다가, 마지막에 남는
단 한 글자를 건져낸다면,
그것이 바로 ‘인(仁)’이다

라는 것이다. ‘인’은 공자의 사유를 지탱하는 기둥이자 근간이며, 그가 후대에 남기고자 했던 핵심 사상이다. 그는 이 씨앗을 심고, 잘 가꾸고 보존해야 한다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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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씨앗을 가장 치열하게 들여다본 사람 중 한 명이 맹자다. 그는 인간에게 ‘인’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단서, 즉 사단(四端)을 찾아낸다. 측은지심 (불쌍히 여기는 마음), 수오지심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 사양지심 (양보할 줄 아는 마음), 시비지심(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아는 마음).

맹자는 이 네 가지 마음을 통해 ‘인’이 인간의 본성 안에 씨앗처럼 들어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흐름은 조선의 성리학자 퇴계 이황에게로 이어진다. 퇴계는 이 사상에 철학적 깊이를 더해 성리학 체계 안에 통합시켰고, 그 정신은 후손들에게 면면히 이어졌다. 이육사는 바로 그 후손이다.


이야기가 한참 딴 데로 흐른 것 같지만, 결국 요지는 이렇다.

공자가 인(仁)의 씨앗을 심고, 맹자가 그 가능성을 발아시키고, 퇴계 이황이 그 사상을 성장시키고, 이육사가 그것을 ‘가난한 노래의 씨앗’으로 노래했다. 나는 그 시간의 흐름과 사상의 물결 속에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다. 오묘하고 깊다.


그렇다면 오늘 내가 심어야 할 씨앗은 무엇인가? 그 질문 앞에서 나는 무겁게 나 자신을 돌아본다. 내가 세상에 남길 단 하나의 씨앗은 무엇이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