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흘러야 깨끗하고 시간은 흘러서 아름답다
홀로 남는 사랑이 두려워서 도망만 다녔던 인생, 궤도에서 벗어난 델라의 삶을 원래 궤도로 돌려놓은 것도 사랑이었다.
택시는 한 명의 여자 승객을 태우고 있습니다. 그녀의 태어날 적 이름은 아델라인 보우먼입니다.
여자의 시작과 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자의 태어날 적 이름은 아델라인 보우먼이다. '태어날 적의 이름'이라는 건, 아마 하나 이상의 다른 이름이 존재한다는 뜻. 주인공은 어쩌다가 이름을 여러 개 갖게 되었을까.
아델라인은 어느 날 사고를 당한 뒤 번개를 맞고 유전자 변형이 일어나 영원히 늙지 않게 된다. 그저 노화가 느린 줄로만 알았던 아델라인은 40줄이 넘어서고야 제게 현대 의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슨 문제가 생겼음을 알게 된다.
실험 대상으로 FBI에게 쫓기게 된 아델라인은 결국 사랑하는 딸을 딸이라 부르지 못하고 10년 단위로 신분을 바꾸며 살아가게 된다. 그게 그가 태어날 때 갖게 되었던 그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고 수많은 이름을 갖게 된 이유다.
참 우스워, 나이를 얼마나 먹든 여전히 새해 전야엔 뭐든 가능할 것 같아.
올해 다짐은 뭔데?
늘 똑같지. 진정한 사랑. 자기는?
올해를 내 인생 마지막 해처럼 사는 것.
우리 나이면 언제 죽을지 모르지. 아무렴 어때, 살아보자고.
친구와 나누었던 이 대화가 운명의 선고라도 되는 듯, 새해 첫날, 아델라인, 그러니까 제니는 신년파티에 참석해 엘리스를 만난다. 그 어리고 자신감 넘치는 남자는 제니에게 적극적으로 대시한다. 그러나 아델라인은 곧 지금 머물던 지역에서 다른 주로 이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이곳에 정착한지 10년이 지났기 때문이다. 제니는 남자의 대시를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다음날 1월 1일에 태어난 아델라인의 생일을 맞아, 자신보다 늙은 딸을 만나러 간다.
식당에서 만난 딸은 이제 누가 봐도 아델라인의 딸이라기보다는 할머니로 보인다. 녹지 않을 눈이 내린 새하얀 머리, 곧 실버타운으로 들어가야겠다는 말들. 또 한 사람이 아델라인의 곁을 영영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삶이란 정지 버튼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아 흐르기만 할 뿐인데, 아델라인은 영원한 젊음을 얻은 대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늙어갈 권리, 흐르는 시간에 몸을 맡길 권리,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지 않을 권리를 모조리 박탈 당했다.
영원은 겉으로 보기엔 영원히 아름답고 젊고 건강하고 활기찰 것만 같다. 하지만 그의 어린 딸은 그보다 늙어 이제 계단을 오르내리기도 어려운데 아델라인만은 아직도 29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원하지도 않은 영원의 대가는 끝을 알 수 없는 외로움으로 치러야 했다.
딸을 바라보는 아델라인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지만, 주변의 모두가 흘러가버리고 홀로 그 자리에 고여 사무친 외로움에 빠진 사람 같았다.
뭐든 얘기해 봐요, 다 믿을게요.
모르는 게 나아요.
그렇지 않아요.
영원히 잊지 못할 말을 해줘요.
잊으세요.
대부분의 인간은 철저히 미래를 산다. 아니면 과거. 현재를 사는 인간은 드물다. 그러나 과거, 현재, 미래에 사는 인간 중 가장 행복한 건 현재를 사는 인간이다.
과거에 사는 사람은 후회하느라 바쁘고 미래를 사는 인간은 불안하느라 바쁘다. 그러나 현재에 사는 인간은 흐르는 구름이 예쁘고 그 구름을 함께 보는 내 옆에 앉은 사람과 지금 당장 즐겁기 바쁘다. 당장 스치는 겨울 공기가 시원하고 웃을 때 터지는 입김이 유쾌하다.
과거, 사랑했던 남자가 청혼하려는 모습을 보고 아델라인은 두려움에 도망쳤다. 그 순간을 지금 떠올려도 아델라인은 눈물이 났다. 그 후 40년이나 지난 지금, 새로운 사랑이 눈앞에 나타나지만 여전히 아델라인은 정지한 자신을 지나 떠나버릴 그와 함께하지 못하게 될 미래가 두려웠다.
그의 딸은 미래가 없으면 다 부질없다는 아델라인에게 ‘무슨 소리야, 미래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얘기한다. 넘쳐나는 게 시간이지만 이미 두려움에 익숙한 아델라인은 그 무한한 시간은 무한한 외로움일 것이다.
아델라인은 늙지 않는 인간이라, 아이러니하게도 현재를 살 수 없는 인간이다. 살기 위해 버려야만 했던 과거는 후회가 되어 아델라인을 붙잡고, 다가오는 미래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다는 외로움, 사랑하게 된다면 결국 아델라인 스스로가 만든 규칙을 따라 10년 안에 떠나야 한다는 비참함만이 존재한다. 젊음을 향유할 수 있는 건 젊음이 유한하기 때문이다.
아델라인의 세포는 늙지 않고 언제나 젊지만, 대신 아델라인의 영혼이 낡아가고 있음은 분명했다. 인간의 영혼은 언제나 후회와 불안에 부식되니까.
아델라인의 딸은 내가 엄마처럼 젊고 예쁘다면 사랑에 빠지고 싶어, 당장 내일이라도.라고 말한다.
영원히 젊은 여자는 결국 이별하게 될 사랑이 두려워 시작조차 하지 못하고 나이를 먹을 수밖에 없는 평범한 딸은 자신이 엄마처럼 젊었다면 사랑에 곧장 빠졌을 거라고 한다. 인간은 자신이 가지 못한 길을 궁금해한다. 아델라인에겐 선택할 기회가 아직 있었다. 엘리스를 사랑하지 않는 길을 갈 것인가, 엘리스와 사랑하는 길로 갈 것인가. 지금 당장 아델라인이 행복할 선택을 해야 했다. 인간은 현재를 사는 동물이니까.
딸과의 대화에서 용기를 얻은 아델라인은 엘리스를 찾아간다. 모질게 내쳤던 것을 사과하고, 엘리스가 아델라인에게 말했던 것처럼 '가본 적 없는 곳'으로 데려가 주겠다고 데이트를 신청한다. 아무도 찾지 않는 자동차 극장, 그 천장에 박힌 가짜 별자리는 진위 여부에 관계없이 연인의 밀담을 낭만적으로 만든다.
그녀를 사랑하니?
네.
그걸 어떻게 알아.
아버지.
간단한 질문이잖니? 어떻게 알아?
제니가 없는 세상은 무의미하니까요.
새로운 사랑의 시작일 것만 같았지만, 예상치 못한 과거의 사랑, 아델라인이 버렸던 나이 든 윌리엄을 마주치게 되며 그의 마음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결국 다시금 도망치던 아델라인은 눈앞에 스쳐 지나가는 자신의 회피의 역사를 보고, 더는 도망치지 않기로 한다. 이미 아델라인을 향해 달려오는 중이던 엘리스에게로 차를 돌린다. 이제 두 사람의 방향은 서로에게 고정되었다.
아델라인의 애칭은 델라, 아델라인을 사랑해서 그에게 청혼까지 생각했던 남자는 천문학자가 되어 발견한 혜성에 '델라'라는 이름을 붙인다. 남자가 '델라'가 지구에 근접할 거라고 예측했던 날짜에 '델라'는 오지 않는다. 그리고 남자는 매년 델라를 기다린다.
혜성 '델라'의 이야기는 아델라인의 삶을 뜻하는 게 아닐까.
'델라'가 궤도를 벗어난 것처럼, 아델라인은 평범한 인간들이 살아가는 궤도를 벗어났다. '델라'가 오지 않은 것처럼, 아델라인은 윌리엄에게 가지 않았다. 그러나 엘리스를 만난 뒤, 그를 사랑하기로 결심한 아델라인은 다시 사고를 당하고 죽음의 문턱에서 삶으로 돌아온다. 이상이 생겼던 유전자가 원래의 성질을 되찾으며 아델라인의 인생은 다시 평범한 인간의 궤도에 오른다. 그리고 '델라' 혜성도 늦었지만 지구를 스쳐 지나가게 된다.
영화는 영원히 젊은 여자의 인생을 보여주면서,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때를 놓친 사랑? 영원의 부질없음? 운명적 로맨스?
영화는 나에게 그 무엇도 아니라 아니라, '지금을 살아라'라고 말했다. 후회와 두려움으로 현재에서 도망치지 말고 지금 사랑하고픈 것을 사랑하라고.
우리의 인생은 너무나 찰나라서, 그 모든 사랑과 행복을 누리기에도 부족하다고.
요즘 나는 내가 얼마나 많은 것들에서 도망쳤는지 자주 생각한다. 그리고 마침 보게 된 영화가 나에게 현재를 살라고 말했다.
지금 이 순간,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은 커피 한 잔이다. 나에게 한 잔을 선물하며 이 글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