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표류기(2009)

여기 반드시, 분명히, 존재하는 건 희망이기도 했다

by 지태엽


대한민국에 가장 흔한 성 ‘김 씨’의 ‘표류기’라는 제목부터 이 영화의 두 주인공은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의 이야기라고 말하고 있다. 섬에 갇힌 김 씨, 김성근과 자신의 방이라는 공간에 갇힌 김 씨, 김정연. 영화는 두 조난자의 이야기다.


현실에 떠밀려 자살을 택한 성근은 한강에 과감히 뛰어내리지만 눈을 뜨자 그는 죽지도 못했으며, 멀쩡하게 살아 한강의 무인도에서 눈을 뜬다. 119는 구조 요청을 장난 취급하고(여기서도 지나치게 예의를 차리는 모습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비위를 맞추기 위해 납작 엎드리는 게 몸에 밴, 지친 현대인 같았다) 전화가 끊기자마자 다급히 전화한 옛 연인은 자기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린다.


‘성근’의 상상 속에서 그는 수영장 물에 빠져 곧 죽을 듯 허우적거린다. 성근의 구조요청이 모조리 무시당한 것처럼, 그 앞을 지나가는 누구도 그에게 손을 내밀지 않고 말을 얹기 바쁘다.

어릴 적 아버지가 나타난다. ‘남들 다 하는데 너는 왜 그게 안되냐?’라고 말한다. 구조조정으로 직장을 잃어 구직활동을 하다 만난 면접관은 그의 이력이 탐탁지 않아 하고, 연락하지 말라고 전화를 끊었던 옛 연인 수정이는 담배를 피우며 그에게 상처 주는 말만 뱉을 뿐이다. 신나게 노래하며 춤추는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는 대출 광고 송이다.

누구도 손 내밀지 않는 상황. 물에 빠져 죽을라 말랑, 김 씨는 그래도 최선을 다해 허우적거린다. 죽는 것도 못해서, 끝까지 아무도 구해주지 않는데 끊임없이 허우적거린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게 결말과 연결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무도 구해주지 않는 현실에서, 나를 구할 수 있는 건 나 자신뿐이다. 성근을 구한 건 사회가 아니다.


아무것도 없는 무인도. 이름답게 사람은 성근뿐이다. 아무것도 없지만 아무도 성근을 괴롭히지 않는다. 잊고 있던 어릴 적처럼 꽃의 꿀을 따먹으며 울던 성근은 그곳에 정착하기로 한다.

저보다 먼저 흘러들어왔는지 아무렇게나 주차(?) 된 오리 배가 성근의 첫 집이 된다.


오리가 나를 품습니다
나는 미운 오리 새끼입니다
백조가 아닌 백수가 된
그냥 미운 오리 새끼

그 오리 배를 안간힘을 써서 끌고 가는 성근의 모습을 멀리서 목격한 사람이 있다. 그는 집에 틀어박혀 나가지 않고 카메라로 세상을 보는 김정연이다. 김성근의 섬에 성근만 있는 것처럼 정연의 공간에는 정연밖에 없다. 정연은 다른 사람의 사진을 도용해 그게 자신인 양 싸이월드를 운영 중인 히키코모리다. 닉네임은 돌로레스로, 검색해 보니 돌로레스는 고통, 슬픔을 의미한다고 한다. (스페인어권 국가의 여성 이름이라는데 왜 사람 이름에 고통, 슬픔을 사용하는 건지 모르겠다)

1년에 두 번, 민방위 훈련이 있는 날이면 도시가 모두 멈춘다. 그때 정연은 창문을 꽁꽁 가린 커튼을 걷고 세상을 구경한다. 카메라를 돌리다 우연히 성근을 발견하게 되고, 그때부터 매일 성근을 지켜본다. 그러다 그에 대해 더 알고 싶어지게 되고, 와인병에 편지를 담아 그토록 나가기 무서웠던 세상 밖으로 나가 한강에 던져 편지를 보낸다.


섬에 흘러들어온 쓰레기를 활용해 삶을 꾸려가던 성근은 짜파게티 봉지 속에서 짜파게티 분말을 발견한다. 그때부터 그의 목표는 면까지 만들어 짜장면을 먹는 것이 된다. 새의 배설물에 있을 씨앗을 믿고 농사를 시작한 성근은 다리에서 뛰어내리기 직전. 현실에 찌든 모습 보다 훨씬 행복해 보인다.

되잖아! 반드시 가능해!
여기 분명히 씨앗이 있다.
반드시 씨앗이 있어!

오리 배를 친구 삼은 성근이 잔뜩 상처 입고 더러워진 오리 배를 바라보며 말할 때, 나는 그의 눈이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다. 성근이 다리에서 뛰어내리기 전, 이렇게 확신에 가득 찬 얼굴로 크게 소리친 적이 있었을까? 짜장면을 먹고 싶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인간은 저렇게나 반짝일 수가 있다.


짜파게티 껍질에 코를 박은 모습을 지켜보던 정연은 성근이 머무는 섬으로 중국집 짜장면을 배달시키지만 성근은 짜장면은 자신의 ‘희망’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호의를 거절한다. 배달원은 반송된 짜장면을 정연에게 다시 배달한다. 전해달래요. 자기한테 짜장면은 희망이래요. 메시지와 함께. 희망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거였다. 성근은 그것을 무인도에 살며, 정연은 그것을 무인도를 보며 배운다.

그러니까, 여기 반드시 분명히 존재한다고 성근이 외쳤던 건 희망이기도 했다. 희망, 씨앗. 희망의 씨앗.


주인공이 다시 자신이 왔던 현실로 돌아가야만 이 이야기는 완성이 된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성근이 그렇게나 아끼던 오리 배가 떠내려가는 모습에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성근의 집이나 마찬가지였던 오리 배가 떠내려가는 장면은 그 무인도가 성근의 진정한 집이 아니라는 뜻일 테다.

설상가상 무인도에 한강정화작업을 하러 온 공무원들에게 성근은 비참하게 끌려나간다. 멸시와 폭력을 한몸에 받으며 안전가옥에서 쫓겨나는 그 모습을 모두 목격한 정연은 성근을 찾으러, 편지를 보낼 때마다 쓰던 헬멧도 우산도 장난감 병정도 모두 잊은 채 밖으로 뛰쳐나간다. 미친 사람처럼 그를 찾지만, 가까스로 찾아낸 성근은 버스를 타고 떠나버린다.

그러나 운명처럼, 버스를 쫓아 뛰던 그때, 민방위 사이렌이 울리고 길 위의 모든 것이 멈춘다. 각자의 무인도에서 성장한 두 사람이 만나야만 한다는 듯이.

정연이 자신을 소개할 때 돌로레스가 아닌 내 이름은 김정연이라고 하던 모습이 선명하다. 돌로레스, 고통이라는 이름에서 벗어나 자신을 소개하는 김정연은 죽을 듯이 뛰어 버스에 탑승한 탓에 땀으로 흠뻑 젖어 꼬질꼬질하다. 빛나는 꼬질꼬질함. 고통을 벗은 정연은 웃었다.


<김씨표류기>의 영제는 <Castaway on the moon>이다. 번역하면 <달 위의 조난자>가 되는데, 아마 서울이라는 도시가 지구, 그 도심에서 뚝 떨어진 섬을 달에 비유한 게 아닐까.

24시간 365일 빛이 꺼지지 않는 도시와 사람 하나 살지 않아 고요하기만 한 무인도는 지구와 달의 관계와 비슷하다. 영원히 달에서 살 수 없으니, 달에 떨어진 이가 지구로 돌아오게 되는 건 당연하므로(안 당연한 영화도 많지만 이건 성장 휴먼 영화니까……) 언뜻 영제를 통해서는 이 이야기가 표류로 끝나지 않고 여행이 될 거라는 짐작이 더 쉬워 보인다.


현실에 발 딛게 된 주인공들이 걱정되지 않는 이유는 무인도에 체류하는 동안 두 사람의 사고방식이 바뀌었음을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현실은 달라진 게 없다. 여전히 비정하고, 차가운 개새끼들이 가득하며 그들은 기준에 맞지 않는 이를 멸시한다. 그것은 성근을 끌어내던 사람들의 모습으로 알 수 있다.

너무 거대한 현실은 소시민이 바꿀 수 없으니 보는 사람의 시선이 바뀌어야 했다. 희망과 행복에 집중하는 것에 에너지를 쏟지 않으면 너무 많은 불행들이 나를 살라 먹게 된다.

정연과 성근은 희망은 짜장면이라는 걸 아는 이들이니, 그들이 살아낼 삶은 예전과는 다를 것이다.

(무인도로 튀어봤으니, 힘들면 또 튀면 된다는 것도 배웠지 않을까. 이 나라는 포기하고 도망치는 것에 관대해질 필요가 있다……)


희망이 없는 도시, 희망이 있는 무인도라는 수식은 무의미하다. 두 장소 모두 희망은 없다. 희망을 갖고 있는 건 사람이기 때문이다. 짜장면을 희망 삼는 것도 사람이다.

도시에서 희망을 박탈당하고 쫓겨났던 주인공들은 영화의 결말에서 희망을 품은 채 돌아간다. 그래서 이 영화의 제목은 ‘표류기’지만, 관객들은 마치 긴 항해를 끝낸 것처럼 여운이 남게 되는 것이다. 진짜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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