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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리 Oct 19. 2024

무서운 이야기를 써야 하는데

글쓰기 교실 첫 과제

나는 허당이다.

예상대로 딱딱 맞아떨어지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매번 내 생각과는 다른 길로  가버린다. 허둥대는 나를 보며 엄마는 헛똑똑이라고 했다. 바보는 아닌데 실속은 못 챙긴다고.

나이 먹는다고 타고난 성품이 크게 바뀌지는 않아 지금도 그러고 산다. 예상은 꽃길이었으나 현실은 가시밭길이다.

한가로운 봄날 핸드폰을 뒤적이는데 어라? 도서관에서 번역가와 함께 원서 읽으면서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갖는다는 공고가 떴다.

번역가가 책을 읽어준다고???나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대박!!!전화를 했더니 집에서 10분거리에 있단다.

그 도서관이. 며칠은 들떴고 행복했다. 딸이 주문해 준 책을 받아 펼쳐보기 전까지만. 손바닥만 한 책에 세로로 늘어선 깨알같은 활자를 보며  이게 글씨야 개미 이사 가는 거야ㅠㅠ

절망에 빠졌다. 그래도 내가 읽을 거 아니니까 마음 놓고 갔다. 첫 시간에 번역가님은 예쁜 얼굴에 차분한 목소리로 다음 시간부터는 돌아가면서 읽고 번역까지 해야 한다고 겁을 줬다. 이보세요 번역가님!!!문법만 이해하면 된다면서요!!! 속으로만 소리쳤다. 그날부터 책 읽기는 노동이 됐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 번 도서관엘 갔는데 유리문에 또 다른 공고가 붙었다.

작가와 함께 하는 글쓰기 수업이란다. 이건 대단한 횡재다.

작가한테 공짜 강의를 듣다니. 물어보니 이미 마감됐단다.

그럼 그렇지. 난 또 한발 늦었다. 며칠 후 2기 모집한다는 말을 듣고 냉큼 이름을 올렸다. 젊어 한때 등단을 꿈지지 않는 자 있기는 한가? 현역 작가한테 글쓰기 수업을 받으려고 비 맞는 게 싫은 줄도 모르고 갔다.

기승전결 탄탄하게 가르쳐주길 기대하면서. 그런데 그 작가님은 하얗고 고운 얼굴로 생글생글 웃으면서 여성이라서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던 극한 공포에 대한 글을 써 올리라는 숙제를 내줬다.

이보세요 작가님!!!던져진 주제에 술술 글을 써 내려갈 수 있었다면 비 맞으면서 여길 왜 왔겠냐고요!!!또 속으로만 비명을 질렀다. 반드르르한 포장에 난 또 걸려든 거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발 들여놨으니 가는 수밖에.

원서 읽기가 노동이었다면 글 쓰기는 할당량을 다 채우지 못하면 밥도 못 얻어먹을 수 있는 강제노동쯤 되겠지.

무지개를 따라 걸은 줄 알았더니 이번엔 수렁에 빠진 느낌이다. 이제부터는 그동안 겪었던 공포의 순간을 기억해 내야 한다. 나에게 있어서 공포란 어릴 적 들었던 재주를 열두 번 넘어 예쁜 여자로 변한 다음에 슬쩍 남에 간을 빼 먹고 짭짭 입맛을 다시는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 이야기거나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하얀 차돌을 함부로 걷어찼다가는 그날 밤 달걀귀신이 되어 데구르르 굴러 들어온다는 따위의 근거 없는 이야기였고 어린 자식들을 두고 이른나이에 세상을 뜨는 언니들을 보면서 어쩌면 나도 아이들을 다 못 키우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에미로서의 공포였을 뿐, 여자라서 맞닥뜨린 공포는 없었던 것 같다.

그건 의심이 많아 돌다리가 부서져라 두들기기만 하고 건너지는 않는 성격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남편이 투자해서

두 배로 불린 건 마누라밖에 없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듬직한 체구에 기다란 양산을 든 내 모습을 훔쳐보다가 아이고 저 인간 잘못 건드렸다간 비 오는 날 먼지가 나도록 두들겨 맞겠구나 하고 그냥 지나가버린 건 아닐까.

아니 틀렸다. 그날 그때 거기에 내가 없었을 뿐 성격이나 외모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이토록 어지러운 昨今의 時代에선.

으아아아아 공포가 몰려온다. 다음번엔 네 간이야 요염한 웃음을 흘리는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 때문이 아니고 떽떼구르~~달걀귀신이 굴러 들어올 것 같아서도 아니다.

아이고 이걸 글이라고 쓴겨? 발로 써도 이거보단 낫겠네에에에 환청이 들리는 거 같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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