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
뭐 그냥 대충 오래 살아 기쁘다? 인가했는데
'삶에 있어 칠십도 드문 일이다' 였다는 걸 칠십이 눈앞에 닥치고서야 알았다.
내 동기들은 고단함의 대명사 쌍팔년도 생을 중심으로 한 해 늦게 입학한 친구가 몇 명, 조기 입학한 한 살 아래 올내기가 몇 명 섞여 있다. 그들이 작년부터 일흔 살이 돼 일 년에 두 번 동창회 때마다 생일 맞은 친구들을 앞자리에 앉혀, 고깔모자를 씌우고 케이크에 촛불 밝혀 축하해 주고 있다.
어떻게든 살아내야만 했던 그때. 학교에 오가느라 삼십 리 길 걷기는 예사였고 도시락 없는 아이가 태반이라 선생님들은 학교 뒷마당에 가마솥을 걸고 미국에서 보내온 옥수숫가루에 전지분유를 섞어 빵을 쪄, 영양실조로 비쩍 마르고 얼굴엔 얼룩덜룩 버짐이 핀 허기진 제자들 손에 들려주셨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지역에 하나 있는 중학교에 진학했을 때 아이들은 절반만 남아있었다.
몇 명은 도시 중학교로 갔고 나머지는 먹고살기 위해 학업을 포기해야 했다. 우리 중 누구도 원해서 그 학교에 간 사람은 없었다. 선택의 여지없이 가야만 했던 하나뿐인 시골 중학교. 먼지가 펄펄 날리는 신작로를 걷는 우리는 학교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같은 얼굴들이었다. 삼 년이 지나 한 울타리 안에 있는 농업고등학교로 진학했고 친구들은 또 반토막이 났다.
그나마 중학교 삼 년은 편하기라도 했지,농업고등학교 특성상 삼 년 내내 교실에 있기보다는 실습이라는 명목 아래 모내기에 벼 베기에,뽕밭으로 인삼밭으로 내몰렸다. 그래도 틈틈이 흙먼지 이는 운동장에서 공을 쫓아 우르르 몰려다니기도 하고, 선배들이 심고 가꾸었을 학교를 빙 둘러 우거진 아카시아 숲에서 달콤한 향기에 어지러웠고 여름엔 바람 부는 그늘 아래서 나무에 붙어 우는 매미보다 더 시끄럽게 떠들며 우리의 십 대를 보냈다.
졸업 후 뿔뿔이 흩어졌던 우리가 서로를 찾기 시작했을 땐 이름을 말하지 않으면 못 알아볼 정도로 변한 마흔 중반이었다. 십 대를 같이 보낸 그들은 헤어져 있던 이십여 년 동안 자신이 선택한 곳에서 탄탄히 자리 잡아 제 몫을 다하고 있었다. 엄마가 열 달 품어 우리를 세상에 보냈듯 그토록 가기 싫어했던 시골구석 손바닥만 한 학교는 우리가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발판이 돼 주었던 것이다.
이태 전 한 해에 친구 둘을 잃었다. 백 세 시대라지만 공평하게 백 살까지 살 수 없고, 누구나 일흔 살 생일에 고깔모자를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인생 여정의 시작은 아나 끝은 모르니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 평균 수명 마흔 살 안팎이었을 천삼백 년 전 두보 시인 말씀은 지금도 옳음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