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집이나 역마살 아들 시키 도화살 딸년 하나라도 있으면 그 집구석 망조 들었다고 수군거리던 곳에서 한 발짝 건너 격세지감 찜쪄먹게 변화무쌍한 쪽으로 접어들고 보니 역마살 만땅 아들에 도화살 충만한 따님 한 분만 계시면 가뿐하게 건물주로 등극하는 세상이 됐다. 그런데 이 집은 애고 어른이고 타고나길 책상물림이니 자연스럽게 이생망이네.
양쪽 아버지들께선 음주 가무에 주색잡기로 무지갯빛 세상을 살다 가셨는데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자손들은 하나같이 무덤덤 회색빛 일색이다.
단체 문화에 휩쓸리던 젊은 날 왜 그렇게 모일일은 많고 만나기만 하면 음주 가무가 당연지사로 따라오는지 술과 노래에 담 쌓고 사는 나로서는 죽을 맛이었고 남편은 나보다 한술 더 뜨는 맹탕이니 오죽하랴.
아우 증말!!! 이럴 줄 알았음 진작에 밟히고 채이는 게 남자였을 때 모조리 노래나 시켜 볼 걸. 땅을 치고 후회해 봐야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터진 콩자루였다.
춤과 노래를 즐기는 사람은 뛰고 놀고, 난 박수나 쳤으면 좋겠는데. 기어이 무대로 끌어내 웃음거리로 만들고야 마는 사회자를 피할 방법은 지명 당하기 직전에 달아나야 할 시간을 정확히 짚어내는 눈치를 발달 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틀림없이 좀 전까지 웃고 박수치며 노는 걸 봤는데 다음번에 불러내려고 곁눈질로 살피니 이미 사라지고 없어서 사회자가 몹시 아쉬워했다는 말을 전해 듣기도 했다.
그나마 부부 동반 수십 명이 모이는 데서야 출입구 가까이 자리를 잡고 앉아 놀다 같은 테이블 사람들과 눈인사로 마무리하면서 조용히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스무나무명 남짓인 선후배 모임에선 옴치고 뛰는 재주 없이 옴팡 당해야만 했다. 만날 때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보니 약이 바짝 오르고 화가 치밀었다.
그래,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노래에는 노래다.
기다려라, 이 선배님들아. 내 기필코 니들 코를 납작하게 눌러 한방에 보내주마! 이를 갈면서 테이프 양쪽으로 노래 한 곡을 촘촘하게 녹음 해 운전할 때마다 듣고 따라 부르기를 수개월.
나를 완전히 노래에 담가버렸다.
그해 십이월 어김없이 망년회는 시작되었고 우리의 고행도 예정됐던 그날. 순서에 따라 마이크를 들고 불안한 모습으로 서 있는 나를 보면서 선후배님들께선 한껏 입꼬리를 올리며 웃고 즐길 준비를 하고 있던 그때. 쿵쿵쿵쿵 번쩍거리는 불빛과 함께 흘러나오는 반주에 맞춰 훈련받은 개가 간식 종소리에 침 흘리듯 자연스럽게 노래에 담가놨던 나를 꺼내 일으켰다. 내가 노래를 안 할 뿐이지 못 하는 게 아니었다고!!
쟤가 먼일이래 저 형수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웅성웅성 소란스러워지더니 우와아~~~박수 소리와 함께 함성이 뒤섞인 휘파람 소리에 이어 앵콜과 신청곡이 쏟아졌다. 어때, 봤지? 내가 이겼다.
만세 만세 만만세다!!! 그날 늙은 선배님들은 무대로 뛰어나와 신나게 춤췄고 판은 완전히 뒤집혔으나 애석하게도 내가 할 수 있는 노래라곤 죽기 살기로 연습했던 <노란 샤쓰의 사나이> 단 한 곡뿐이라 그들이 원했던 신청곡 <아파트>는 끝내 부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