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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고추장을 아시나요?

by 제리

일 년 내내 먹는 것이니 해가 바뀌면, 첫 번째로 하는 일이 장 담그기다. 말 날 장을 담가야 장맛이 달다고 했으니 믿거나 말거나 그날을 찾아 소금물 풀어 장을 담근다. 날이 따뜻해질수록 소금이 많이 들어가고 자칫하면 장맛이 변할 수도 있으니 대체로 설 지나고 첫 번째 말 날이 장 담그는 날이 된다. 절기로는 입춘 전후 쯤이다. 메주 한 말 8키로에 물 한 말 20리터 소금은 메주 무게 절반인 4키로의 비율로 한다. 물에 소금을 풀고 신선한 달걀을 넣어 오백 원짜리 동전만큼 떠오르면 딱 맞는 염도다. 가지런하게 추린 볏짚 한 줌을 태우면서 소독한 항아리에 미리 씻어 말린 메주를 차곡차곡 넣고 전날 풀어 가라앉힌 소금물을 붓는다.

마른 고추 몇 개 띄운 다음, 불에 벌겋게 달군 참숯 서너 덩이 넣으면 치직 소리를 내며 하얀 김을 올린다.

이것들이 무슨 힘으로 잡균을 없애리오마는 그렇다고 하셨으니 믿는 수밖에. 단맛이 우러나도록 마른 대추 여남은 개 넣고 참깨도 두 꼬집 뿌린다.

장 고소해지라고. 정말 고소해지는지는 며느리는 고사하고 시어머니도 모를 일이지만 시키는대로 했다.

망사 덮개를 씌우고, 뚜껑을 열었다 덮었다 하며 햇볕은 쫴주고 비나 눈이나 이슬 따위 물기는 피해 가며 40일을 기다려, 메주를 건져 고추씨 가루를 섞으면서 주물러 항아리에 담아 두 달쯤 익히면, 마른 고추와 불에 달군 참숯이 무서워 잡균은 달아나고 대추와 참깨 덕분에 달고 고소해졌을 된장이다. 간장은 고운 체에 밭쳐 팔팔 끓여 독에 부어 익힌다. 햇 간장.

맑아서 청장이고 국간장 이라고도한다.


마당 넓은 집. 장독대에 시어머니의 시어머니때 부터 있었을, 콩 서너 말 메주 쑤어 두달 반 말리고 띄워 장 담그고 고추와 솔가지 새끼줄에 엮어 금줄까지 둘렀었을, 백 년 묵은 독부터 명인이 빚었다는 이름 찍힌 조무래기 항아리까지 줄 지어 있던 때의 이야기다. 아파트라는 공간은 살기는 편하나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그나마 장 담그고 익히기엔 옹색하지만 아쉬운 대로 고추장은 담가 먹을 수 있었다. 가장 쉬운 찹쌀고추장을 담그는데 어느 날 카스에 은은한 대추 향이 일품이라는 대추고추장 글이 올라왔다.

고추장이 고추장이겠지, 뭐 그리 특별할라구. 모른척했지만 내 귀는 팔랑 귀. 자꾸만 대추고추장 쪽으로 기울어지는 나를 억지로 잡아일으키며 외면하는데 급기야 대추고추장 일 키로를 칠만 원에 파는 사람이 나타났다. 이 정도라고? 그렇다면 이건 해 봐야 해. 난 또 넘어갔다. 부랴부랴 냉동실을 뒤져 가을에 사 두었던 보은대추 한 봉다리를 꺼내 식초 탄 물에 박박 씻고, 푹푹 삶아 씨와 껍질을 거르고 달여 엿기름에 삭힌 찹쌀 물과 합쳐 고추장을 담갔다.

기대 만땅이다. 그런데 은은한 대추향은 어디로 가고, 한 술 더 떠 햇고추장이 묵은 고추장 처럼 검붉은 마른 대추 색깔이 됐다. 베란다에서 햇볕을 쬐어가며 한 달 동안 익혀, 구구절절 설명하며 가까운 친구 둘한테 한 통씩 줬다. 며칠 후, 어때? 물었더니 한 사람은 맛있어 또 다른 이는 괜찮아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건 맛있는 게 아니고 받아 간 거에 대한 인사 치례다.

이런 젠장 고생만하고 망했다. 그래도 이왕 담근 걸 어쩌나. 내다 버릴 수는 없고 두고 두고 내가 다 먹는 수밖에. 백지장보다 얄팍한 귀를 원망하며 맥빠져 있는데, 무슨 소리. 누가 뭐래도 고추장계의 에르메스는 고구마고추장이라는 글이 천안에서 올라왔다.

고구마로 고추장을? 이건 또 첨 듣는 소리니 무엇이든 알려주는 녹색창을 두드렸다. 그랬더니 내가 몰랐을 뿐 곡식이 귀했던 산간 지방에선 옛날부터 고구마로 고추장을 담갔었단다. 그러나 저러나 고추장 담글 철인데 한꺼번에 올려서 선택할 수 있게 하면 좀 좋을까. 월간 잡지 연재소설도 아니고 띄엄띄엄 한 편씩 올라오다니! 고구마고추장이 궁금해 몸살이 날 지경인데 고춧가루도 항아리도 다 써버리고 없었다.


일 년을 기다려 이번엔 고구마고추장이다. 대추고추장에 속았으니 조금만 해보기로 마음먹고 조막만 한 고구마 세 개와 찹쌀 두 컵으로 고추장을 담가 작은 통에 담아 또 두 사람한테 줬다. 바로 전화가 온다. 뭔 고추장이 이렇게 맛있니?

이건 정말 맛있다는 뜻이니 성공이다. 그런데 너무 조금 담가 나 먹을 게 모자란다. 냉장고 아래 칸에 처박아 둔 대추고추장을 다시 꺼냈다.

올해는 작정하고 35인용 전기보온밥솥을 샀다. 커다란 꿀고구마 다섯개를 쪄서 으깼다. 새 전기밥솥에 찹쌀 2키로로 밥을 해 으깬 고구마와 섞어 엿기름 2키로를 불려 짜낸 길금물을 가득 부어 밤새 삭혔다.

체에 밭쳐 건더기는 버리고 남은 물을 절반이 되도록 달여 항아리 가득 찰진 고추장을 담갔는데, 맛은 커녕 이름조차 생소할 고구마고추장 자랑질하느라 다 퍼주고 또 나 먹을 게 없다. 그래도 올 해는 고춧가루가 남아있어서 꿀고구마 다섯 개만 사면 빈 항아리를 다시 채울 수 있으니 걱정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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