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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 살어리랏다

by 제리

모내기 철에는 그야말로 새벽 세 시부터 아침밥 준비를 해야 했다. 손으로 모내기를 하던 때라 스무 명 정도 일꾼이 오는데 새벽 다섯 시면 벌써 아침 먹고 모판에서 모를 찌기 시작 했고, 하루 다섯 끼씩 밥해대는 일만으로도 까무러칠 지경이었다.

그래도 집과 농지가 붙어 있어 밥 고리를 이어 나르는 수고는 없었다. 대청마루에 차려 놓고 방으로 들어가 잠깐씩 널브러져 있는 걸로 버텨냈는데 이런 나를 보란 듯이 그 여자는 밥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양손에 주전자를 든 채 바람개비처럼 날아다녔다.

온 동네가 한꺼번에 들끓는 것처럼 보여도 차례대로 해나가는 일이어서 바쁜 집에 가서 서로 돕기도 했는데, 밥과 사람이 한꺼번에 논바닥에 처박힐까 봐 나한테 밥 광주리를 맡기는 사람은 없었다. 이렇게 한바탕 난리를 치르면서 봄이 지나고, 여름은 그런대로 견딜만했다.

개울 옆 높다란 둑을 따라 듬성듬성 피어 흔들거리는 해 질 녘의 패랭이는 참으로 아름다웠고 그 길을 걷는 건 시골살이의 낭만이었다.

여름 한복판에 들어서면 마당 옆 텃밭에 줄줄이 늘어선 옥수수가 먹고 싶어 혹시나 여물었을까 모조리 까봤다가 알도 안 들어찬 옥수수 비집어 놓은 게 누구냐고 소리 지르시는 시어어니를 피해 친척 동서네 집으로 냅다 달아나서 놀다 오곤 했다.

다른 일은 다 남의 손으로 해결이 되는데 농약 뿌리는. 일은 품앗이를 해야했다.

일손을 구할 수 없으니 우리 논엔 농약을 뿌리지 못해 메뚜기란 메뚜기는 우리 논으로 다 모여든 것처럼 많았고 벼가 누렇게 익어 갈수록 메뚜기도 벼의 색깔을 닮아갔다.

연갈색으로 여물어 알을 가득 품은 데다 통통하게 살까지 찐 메뚜기를 잡아 볶아 먹을 욕심에 논으로 들어섰는데, 하필이면 통일벼 논이었다.

정부 수매를 하기 위해 심던 통일벼는 키가 작아 잘 쓰러지지 않고 이삭이 많이 달리는 다수확 품종이지만 건드리면 벼알이 우수수 떨어지는 단점이 있었다.

그런 논에 들어가 살찐 메뚜기에 눈이 멀어 목줄 풀린 개처럼 뛰어다녔으니 뒷일은 보나마나였다. 논바닥 휘젓고 댕겨 벼알 다 쏟아놓은 게 누구냐며 노발대발하시는 시아버님 눈을 피해 뒤꼍에 두 그루 있던 밤나무 밑으로 가서 밤 줍는 척 엎드려 있었다.

통일벼 논 한 배미를 해 먹은 나 때문에 그해 겨울 시아버님의 술값에는 차질이 생겼겠지만 텃새들에게는 등 따숩고 배부른 겨울이었음이 틀림없었다. 갓 시집왔을 때부터 독보적인 일솜씨로 한순간에 우리를 쩌리로 만들어버렸던 그 여자도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 있었으니 시제와 김장이었다.

시제 때는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서 어른들은 고기나 생선, 떡 같은 걸 준비하고 우리들은 토방에 연탄 화덕 하나씩 차지하고 앉아 온몸이 기름 냄새에 찌들도록 하루 종일 소당질을 했다. 녹두전을 시작으로 두부 생선 고기를 차례로 익혀냈고 마지막으로 주악을 튀기다가 기름이 튀어 손등을 데기도 했다.

그 일이 끝나면 김장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시골 김장은 배추 포기 수를 정하지 않는다.

아니 무슨 김장 못 먹고 죽은 귀신이 붙었나, 그 넓은 밭에 있는 배추를 몽땅 뽑아 절이는 것으로 김장이 시작된다. 다음날은 절인 배추의 위아래를 뒤집어 꾹꾹 눌러놓고 산더미처럼 쌓인 무를 씻어 밤에는 그 무를 채 썰어야 했다. 사흘째 되는 날 새벽부터 배추를 씻고 전날 썰어놓은 무채에 양념을 버무려 속을 넣는데 이 역시 여럿이 모여서 하는 품앗이 공동 작업이라 내 집 남의 집 가릴 것 없어 김장이 끝나고 나면 곡소리가 날 지경이었다. 그래서 연로하신 시어머님께 살림을 넘겨받자마자 대뜸 김장 배추를 스무 포기로 줄였다.

나름 계산을 한 거여서 섣달그믐에 만두 소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정월부터는 새 김치를 담갔다. 몇 해 편히 잘 사나 했는데 이런 낭패가 있나.

김장 김치 다 떨어진 어느 해 정월 열 나흗날 시어머님이 돌아가셨다.

온전히 집에서 장례를 치러야 했던 때라 허둥지둥 혼이 반쯤 나갔는데 그 여자가 자기네 김장독 하나를 헐어 통째로 가져왔다.

"이 정도면 일 치를 수 있을 거야." 한마디 하고는 사흘 꼬박 장례 뒷바라지를 해줬다.

그 여자는 일머리만 좋은 게 아니라 손도 컸고 마음 씀씀이도 태평양만큼이나 넓었다.

이듬해 정월에 시아버님도 돌아가셨고 그 여자네 김장독 하나를 또 헐어야 했다.

내리 두 해 그 집 김장독을 털어먹은 나는 그 이후 그집 김장이 얼마가 됐던 끽소리도 못 하고 팔다리, 허리를 두드리며 꾸역꾸역 부역을 해야 했다.

이렇듯 우리는 각자 다른 곳에서 한동네로 모여들어 살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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