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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冬至)

by 제리

한 해가 저물어간다.

기상청 예보대로 밤사이 눈이 내려 수북이 쌓여있는 토요일. 오늘은 동지다. 아세(亞歲) 다음 해가 시작되는 작은설이라고도 했다. 지금은 그저 내려오는 말일뿐 동지의 의미도 희미해지고 팥죽 먹는 날로 기억된다.

애동지에는 어린것들이 많이 상한다고 팥죽 대신 팥 시루떡을 쪄 먹는데 올해는 노동지니 맘 편하게 팥죽을 쑤어 먹어도 좋겠다.

입춘 무렵 장 담그기로 한 해를 시작하고 동지 팥죽 끓이기로 일 년을 마무리한다. 여기저기 맛집도 즐비하고 죽 전문점도 있으니 편하게 한 그릇 사 먹는 것도 좋겠으나, 좀 번거롭더라도 이름 붙은 날이니 팥죽을 쑤어보는 건 어떨까. 안 해보던 일이니 생각만으로도 복잡하고 힘들 것 같아 손이 오그라들지만 막상 시작하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빨간 팥 오백 그램 한 봉다리를 깨끗이 씻어 물을 넉넉하게 붓고 불에 올려 부글부글 끓어오르면 떫은맛이 우러난 물을 따라 버리고 새 물을 부어 푹 퍼지도록 삶는다.

무르게 익힌 팥을 식혀 일회용 장갑을 끼고 조물조물 주물러 물을 조금씩 부어가며 얼게미체에 밭쳐 껍질을 거른다. 삶은 팥을 껍질째 믹서에 갈아서 쓰기도 한다는데 껍질을 걸러 버리고 앙금만 쓰는것이 부드럽고 맛있다. 눈이 큰 얼게미체가 없으면 집집마다 하나쯤 있는 스텐 바구니를 쓰면 된다.

불린 쌀로 죽을 끓이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니, 팥 삶는 동안 쌀 두 컵으로 밥을 해, 가라앉은 앙금은 두고 웃물만 따라 붓는다. 처음부터 앙금까지 같이 넣으면 뻑뻑해서 젓기는 힘들고 바닥에 눌어붙기가 쉬워 태울 수 있으니 웃물만 따라 죽을 쑨다.

밥알이 부드럽게 퍼지면 새알심을 넣고,새알심이 바닥에 붙지 않도록 한번씩 저어준다. 새알심이 떠오르면 다 익은 것이니 남겨둔 앙금으로 농도를 맞추고 불을 끈 다음 식성에 따라 소금이나 설탕으로 간을 한다. 죽을 쑬 때 바특하면 식었을 때 밥알이 불어서 밥도 아니고 죽도 아닌 게 되니 멀겋다라는 느낌이 들도록 쑤는 게 좋다.


새알심은 찹쌀가루로 만들면 식감은 좋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 풀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죽은 끈적끈적하게 그야말로 죽이 돼버린다. 그래서 찹쌀가루와 멥쌀가루를 반반 섞어서 하기도 하는데, 하기 쉽고 풀어지지는 않으나 식감이 떨어지고 식으면 단단해져 안 먹게 되니, 찹쌀가루로 익반죽을 해 동글동글하게 새알심을 만들어 멥쌀가루를 깐 쟁반에 데굴데굴 굴려 하얗게 옷을 입혀 죽에 넣으면 쫄깃쫄깃 식감은 살아있고 풀어지지 않으며 죽이 차갑게 식어도 이틀 정도는 그 식감이 유지된다.

찹쌀가루는 물에 불려 빻은 습식이어야하고 멥쌀가루는 보송보송한 건식이어야한다. 찹쌀가루는 찹쌀을 불려 방앗간에서 빻아오거나 떡집에서 살 수 있고, 건식 쌀가루는 마트에서 판다.

긴 설명을 읽다 보면 준비할 것도 많고 과정도 복잡해 보이지만, 팥 한 봉지 밥 두 공기 찹쌀가루와 멥쌀가루에 약간의 소금만 있으면 맛있는 팥죽 한솥을 쑤어 이틀은 먹을 수 있고, 옆집에 한 그릇 나눌 수도 있으니 일 년 중 밤이 제일 길다는 동지에 팥죽을 쑤어 긴긴밤 밤참으로 먹어도 좋을 일이다.


하지 다음날부터 개꼬랑지 만큼씩 짧아지던 낮이 동지가 지나면서 노루 꼬리 만큼씩 길어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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