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로 숨 쉬는 법

철학자 김진영의 아도르노 강의

카타리나 블룸의 취향을 닮고, 오데트를 알아차리며

<철학자 김진영의 아도르노 강의 _ 상처로 숨 쉬는 법> 발제

최근에서야 깨달은 것이 있는데, 나는 ‘읽는 행위’ 그 자체를 사랑하지, 읽는 것을 기억하거나 담아서 새로운 지식을 얻거나 통찰을 발휘하거나 누군가에게 설명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워한다는 점이다. 한강의 오래된 팬인데도, 그의 책을 읽을 때 그 문장 하나에 가슴이 저릿해서 오랫동안 머무르곤 하지만, 사실 그의 작품들의 내용이나 줄거리는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그의 소설이 시간 순서에 따른 줄거리 중심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 그래서 내게 발제는 참 어려운 일이다.


성당에 열심히 다니지도 않는데, 가끔 몇몇 성경 구절이 떠오를 때가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자주 마태복음 25장이 떠올랐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마태복음 25:40)


무자비하다는 아도르노를 읽고 나서 성경구절과 연관짓다니, 아무래도 나는 이 책을 오독한 것인가보다, 했다. 그런데 마지막 장을 읽으면서, 이렇게 이해하는 것도 나름 의미있겠다 싶어 그대로 둔다.


객관화된 권력에 종속된 개인, 권력을 미워하다가 결국 닮아버리는 개인, 자유와 행복으로 가득 차야 할 자아가 권력 구조에 매몰되어 텅 비어버린 상태, 그 상처를 응시하고 모호함을 견디며 상처에 머물러야 개인이라는 공간 속에서 권력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는 기대하지 않았다는 아도르노는, 부르주아, 소시민, 지식인들에게 기대하는 만큼 가차없이 비판한다. 우리의 허위의식, 우월감, 사이코패스적 부드러움, 껴안아주면서 행사하는 권력, 자기의 이익을 위해 도구화하는 지식, 아름다움, 두뇌, 경제적 가치만 남은 집, 프롤레타리아와 함께 할 수 있다는 자기만족적 희생,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는 글쓰기, 권력의 미미크리로서 생존하는 것에 만족하면서도 미메시스라 착각하는 태도, 권력을 미워한다면서 닮아버린 얼굴...

... 자비없이 후벼판다.


너희가 하는 사랑이 사랑 맞냐? 너희가 하는 공부가 진짜 공부냐? 너희가 하는 교육이 무엇을 위한 것이냐? 너희가 배려하면 안겨야 되냐? 왜 너의 육체가 고통스러워 하는데도 그렇게 끝까지 몰아붙이는 거냐. 무엇을 위해서?... 너희는 너희 자신이 권력과 착종되어 있는 한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는 있냐? 거기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너희들의 자아는 텅 비어 있고, 너희가 하는 모든 것은 결국 객관적 권력을 강화시킬 뿐이라는 것을 제발 좀 알아라.

... 아프다. 부끄럽다. 치부를 들킨 것 같다. 죄책감이 든다. 나는 뭔가 알고 있다고, 늘 공부하고 있다고, 뭔지 모르게 자랑하거나 과시하고 싶은 마음을 품은 것이 다 들통나 버렸다.


그럼 어쩌라는 것입니까?

아픈 지점, 거기를 들여다보라. 자유와 행복으로 가득 차 충만하게 형성되어 있어야 하는 주체성이 비어있다. 객관적 권력과 한몸이 되어 사느라 텅 비어 있는 그 상처를 가만히 들여다보라. 그 상처가 왜 생겼는지, 객관적 권력이 어떻게 작용하여 그렇게 되어 버렸는지 알아채라. 조금이라도 알아보았으면, 객관적 권력과 분리되어 행동하려 노력하고, 종국에는 진짜 주체성을 형성한 자아가 되어라.


조금만 더 쉽게 얘기해주실 순 없나요?

(이해력마저도 권력과 착종되어 있구나. 비유를 쓰면 알아먹지를 못하니...)

자발적으로 고독한 시간을 갖고, 그 시간 끝에 새로운 관계에 대한 희구를 얻어라. 그리고 타자를 만나면 함부로 다가가지 말고, ‘사이’를 유지하며 바라보아라. 차이를 존중하고 대화를 나누며, 부드러움으로 서로를 재인식하고, 망설임의 순간을 귀하게 여겨라. 객관적 권력 때문에 얼굴과 자아가 못나지고 있는 인간을 보면, 아주 잠깐 “어휴, 안됐다”라는 마음이 들텐데, 그 마음을 놓치지 마라. ‘저런 바보녀석’이나 ‘불쌍한 녀석’ 같은 생각 말고, 권력에 의해 저리 된 것에 연민을 품어라. 공공의 아픔을 개인의 탓으로 돌리지 마라.


질문해라. 사람답게 사는 것, 충족한 삶을 사는 것은 세상은 유능하게 사는 것과 무엇이 다른 것인가. 글을 쓸 때는 자신을 드러내려 단어를 조합하지 말고, 단어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고 싶은지, 어떻게 드러나고 싶어하는지를 잘 바라보고 감성을 잘 발휘하여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과 객관적 진실이 맞아떨어지는 순간을 찾고 기다리고 포착해서 써라. 글쓰는 자도 권력과 얽혀있기 때문에 스스로 원하는 목적을 위해 글을 쓰는 것은 결국 권력의 논리를 따르게 된다. 대상에 대한 뼈아픈 통찰이 필요하다.


무엇이든, 혼자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표현하지 말아라. 너는 권력에 얽혀 있으므로 네가 하는 모든 것은 객관적 권력을 강화시킬 뿐이다.

항상, ‘과정’을 겪어라. 자발적 고독을 통해 관계맺기로 나아가고, 나와 다른 사람, 환경, 영역과 끊임없이 투쟁하고, 갈등을 겪고, 모호하게 머무르고, 다시 망설이며 다가가고, 대화하고, 서로 맞추어 가고. 둘의 사이에서 머물러라. 함부로 껴안거나 사랑하지도 마라. 그때 너를 도구화하여 아름다움을, 지식을, 슬픔을, 사랑을 이루려고 노력해라.


부르주아 계급에 속한 너를 인정하고, 객관적 권력이 지배하는 너의 자아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성찰의 과정을 통해 주체성을 형성해라. 카타리나 블룸과 같은 태도를 지니고, 오데트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늘 주변을 살펴라. 너의 모든 것이 공공성을 띠도록 성찰하고 성찰해라.


이런 말 하면, 아도르노나 김진영선생이 하늘에서 통탄해마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책을 읽고나니 맘이 유순해진 느낌이다. 30년 넘게 의지하고 있는 신부님이랑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눈 느낌이다.


최근 거의 두 달 동안 푹 빠져서 보고 있는 극우 청년과 청소년, 인셀 이야기와도 연결되며 나의 태도를 정비할 수 있는 기회도 됐다. 책으로 하는 공부의 한계, 현장에서 한발 떨어져 있는 사람의 한계를 여실히 느끼긴 하지만 말이다. 공공성을 띤 주체가 되고 싶다.


“나의 상처로 해방이 되려면 이 사회적인 상처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객관적 권력이 만들어내고 있는 상처를 통해 그 객관적 권력을 알아봐야 하고, 그것이 이루어질 때 나의 상처도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이죠. 객관적 권력에 대해 성찰하지 않고 사회적인 상처에 민감하지 않으면서 내 상처를 치료할 방법을 찾는다면, 상처는 절대 허파가 되지 않습니다. ” - 김진영, <상처로 숨 쉬는 법> 754쪽


김진영 선생은 죽음 앞에서 어떤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었을까.가 궁금해졌다.

자신의 생각과 죽음이 어떤 연관을 맺고 있다고 성찰하며 마지막 날들을 지냈을까 궁금해진다.

그의 에세이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마지막 책들을 읽으며 느꼈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 죽음에 가까이 간다는 것은 좋은 것이구나. 여러 가지 의미에서 그렇다.

결국 아도르노가 직접 쓴 책의 번역은 못 읽었다. (성숙을 위한 교육)

그치만, 철학자의 책보다, 그 철학자의 책을 삶과 연계하여 안내해준 철학자의 책이 참 좋았다.


좋은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우리가 그런 걸 만들려면 미래에 만들어갈 수밖에 없다.

-위의 책 440쪽

새로움에서 낡음으로 흐르는 소멸의 행로가 아니라, 낡음에서 새로움으로 흐르는 생성의 행로를 따라가야 합니다. - 위의 책 5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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