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 않고 일할 권리
어제 건강검진을 받았다. 갱년기가 본격화된 것 같아서, 맘먹고 추가 비용을 내가며 다양한 검사를 받았다. 반일로는 안될 거 같아서 주말을 이용하거나 반일공가를 사용하지 않고 일생 처음으로 종일 공가를 썼다.
공단검진+초음파 검사 등 추가검사+뇌MRA, 암발병 가능성을 가늠하는 혈액 유전자 검사, 골밀도 검사, 모든 장기 초음파 검사 등이었다. 다 하는 데 걸린 시간은 4시간 30분 정도.
젊은 시절에 비하면 해마다 술은 줄이고 운동은 늘리고 있는데다, 50줄에 들어서는 먹는 것도 바꾸고 있는 중인데도 LDL콜레스테롤은 오르고 중성지방은 늘고 당뇨에는 가까이 가고 있는 중이라서 건강검진을 받는 마음이 편치 않다. 체중도 원하는 만큼 조절이 안되니 난감하다. 그나마 운동을 한지 1년이 넘어가면서 코어근육이나 허벅지 근육 등이 늘어나는 게 눈으로도 보이고 느낌으로도 전해서 위안을 삼고 있다. 근데, 초음파 결과만 보고 CT 를 찍어보라는 권고를 받았다. 아니 왜! 내가 이렇게 열심히 관리하며 살고 있는데! 뭐가 문제야. 갱년기야 나이야 일이야. 죽고 싶지 않아! 화가 나서 케익을 먹었다.(음?)
며칠전 대선 결과가 나온 후 우리집 십대남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싸울뻔 했다. 사전투표 하러 가기 직전까지도 5번과 1번 사이에서 고민했던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엄마에게 실망했다는 거다. 그렇게 해서야 어느 세월에 한국이 다당제 국가가 되느냐는 거다. 사실은 4번의 득표율이 너무 낮은 것에 대한 신경질이었을거 같지만. 너무 당연한 고민, 5번의 생존을 위해서는 2번을 막아야 한다는 1번 선택의 이유가 있었던 건데, 아들은 그런 것은 이해하지 못했다. 아들이 생각하는 선거는 후보가 주장하는 공약과 이념을 잘 살펴보고 표를 주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에 비해 벌써 여러번의 투표를 해온 나는 다양한 선택지와 상황, 변수와 감당할 능력을 두루 보고 투표를 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구체적인 공약보다는 그가 속한 당의 이념, 지향, 그리고 국가의 상황을 재보고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공약을 꼼꼼히 살펴볼 만큼 그들에게 관심이 있지도 않았고, 공약이라는 것이 학생회장 선거처럼 교사와 교장의 도움을 받아 어떻게든 이뤄내는 사항이라기보다는 자기가 속한 그룹의 지향을 보여주는 것 정도고, 그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많다는 것을 이미 여러 선거 이후를 통해 알고 있다. 공약을 만들때는 자신들이 국가를 책임지고 국가 전체를 관리해야 한다는 의식 자체가 없이 선명성, 차별성만을 드러내려고 하니까. 부질없다. 공약. 선거 이후 국민들의 희망과 의견을 얼마나 잘 듣고 각분야의 이견을 어느 정도 가중치를 두고 반영할 것인가가 중요한데, 이것은 곧 그 정당의 정체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니까.
하지만 아들은 10퍼센트를 넘지 못한 4번이 마치 이대남들의 희망이 짓밟힌 것처럼 느끼고 있었다. 임금정책과 연금정책을 30대 이상층에서 1번을 지지함으로써 20대의 암울한 미래를 확정지은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이건 좀 맥락상 안 맞는데_) 미국과의 관계가 나빠지고 북한과의 대립이 심해져서 20대 남자들이 군대에 가서 더 고생할 거고, 군 가산점도 모두 사라질 거라고 했다. (? 대체 어디서 이런 이야기를..)
2차대전 시기 각국의 늙은 정치인들이 결정한 참전 결정에 10대 20대 청년들이 전쟁터로 내몰렸던 그런 느낌일까? 어른들이 결정한 파병에 결국 전쟁터로 가야 하는 것은 20대 청년들이 되는 그런 느낌인 거 같았다.
10대 20대 청년들은 우리나라의 미래인데, 그들이 이렇게까지 억울하고 화나 있는 게 이해가 되었다. 연금은 많이 내고 적게 받을 것이고(연금개혁), 일자리는 더 없어질 것이고(정년연장), 군대는 더 위험해질건데 얻는 것은 없고.... 1번의 정책이 이들을 설득한 무엇인가를 내놓지 못한 것은 확실해보였다. 연금개혁과 정년연장이 곧바로 청년의 암울한 미래로 이어질 거라는 단순한 공식(4번의 논리)에 푹 빠져 있었다. A는 B다 라는 일직선 논리였다. A를 해도 B로 이어지지 않게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정치인 것이고, 다양한 조정과 타협과 시간을 통해 천천히 그리 된다는 것을 이제 새 정부가 보여 주어야 한다. 그리고 청년들의 우려와 분노를 잠재워 기다릴 줄 알게 만들만큼 구체적인 정책로드맵과 당장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보인다.
(사실, 1번의 공약집을 자세히 보지는 않아서 이런 게 있는지 없는지도 잘 모르겠다. 감세한다면서 복지를 늘린다는 이상한 논리만 자꾸 나오니 아이들이 믿지 못하는 것도 납득이 된다.)
대선 출구 조사가 나오고부터 5번에게 후원금이 13억 들어왔다고 한다. 나같이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나보다.
선명성 면에서는 4번이나 5번의 수준이 비슷했고, 지지층의 한정성 면에서도 비슷하고, 만에 하나 집권한다 해도 안정적 정국 운영은 불가하다는 것도 비슷하다. 다당제 국가가 되어야 연정이라도 가능할텐데, 좌우로 쪼개진 지도를 보면 한숨만 나온다. 나는 대체 언제나 나의 정치적 지향점을 위해 안심하고 투표할 수 있을까.
나도 어느정도 늘 정치에 대해 냉소하는 사람이라 이들의 정책이 뭔지 구체적으로 모르고 있었다. 아들이랑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연금개혁에 대해 공부를 좀 해보기로 했다.
"엄마한테 실망했어"
이 말이 귓가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오랜만에 맞은 연휴에 집밖으로 한걸음도 나가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4,5월에 공부하던 극우청년 관련한 것들이 불안세대를 다시 읽는 것으로 이어지고,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아이들을 키우라고 해야 하나를 고민하게 되면서 책들을 좀 샀다. (또) 교장이 되면 학부모 교육을 필수로 시행해야야겠다며 읽는 중이다. 책을 끼고 행복하게 음악을 듣고 연휴를 보내자 했는데, 뉴스에 김충현 씨의 책상 위 사진이 나오는 거다. <이재명과 기본소득>. 사진으로만 봐도 성실하고 착한 사람일 게 뻔한 노동자였다.
현충일 15시에 서울역 앞에서 추모제가 있다는 거다. 맘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대선 막바지에 발생했던 두 사건, SPC와 태안발전소에서 몇년 만에 동일한 사건이 벌어졌다. 소잃고도 외양간을 고치지 않았구나. 중대채해처벌법을 만들고 노동자의 작업환경을 안전하게 만들겠다고 그리 큰 소리들 쳤는데 대체 왜.
"죽지 않고 일할 권리"
김용균이 죽고 나서 내내 맘 속에 품고 살게 되었던 말이다. 구의역에서 죽은 아이 가방에서 나온 사발면을 생각하면서 또 생각했던 말이다. 아. 생각만 가지고 될 일이 아니었는데.
나이들고 조금 편안한 삶을 살게 되면서 늘 생각만 하고 사는 거 같다. 안가면 후회할 거 같아서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서울역 거리에 다녀왔다. 죽지마라. 밥 잘 먹어라. 하는 노래 가사를 들으며 눈물이 안 날리가 있나. 뭔가. 뭔가 내가 할 일이 있지 않을까? 내가 일했던 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이 일하다가 죽지 않도록, 죽음에 내몰리지 않도록,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집회 가는 거 말고,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제주에서 교사가 죽었다. 하루하루 위태롭게 학교를 견디는 교사들도 많다. 나는? 나는 일하다 죽지 않을까?
내 의식 속 저 아래서 깨어났다.
전태일, 김용균, 김충현.
평등의 감각. 그는 나다.
잊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