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교육을 넘어 정치교육으로
몇주 전, 내가 나의 병을 알기 전에, 공문으로 민주시민교육 심포지엄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박근혜가 대통령일 때 중3들을 데리고 시민교육을 2년간 이어왔던 경험을 바탕으로, 시민교육이 인간의 성장에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한 후, 민주시민교육 장학사로 선발되었고 이후 역사교육을 근간으로 민주시민교육을 고민했고, 민주시민교육 담당 장학사로 일했었다. 당시에는 민주시민교육이란 용어 자체가 낯설 때라 다양한 방식으로 이슈화하거나 성과를 공유하는 게 주된 임무였다.
2019년 호치민으로 떠나기 전 나의 마지막 업무가 국제 민주시민교육 포럼이었고, 당시 메인 연사가 비에스타(존경한다.)였다. 그 이후 이래저래 랑시에르, 아렌트, 레비나스 등과 연관지어 비에스타를 공부할 기회가 조금 있었다. (재미있었다) 서울시교육청의 민주시민교육 포럼은 꽤나 유명한 행사여서, 전국의 교육전문직과 교사들이 많이들 오는 행사였다. 주로 주말에 했었다.
하여 오랜만에 흥미로운 행사라 생각되어 신청했는데, 병으로 인해 병가를 사용 중인 7월 14일 (프랑스대혁명 기념일)에 무려 코엑스까지 행차하게 되었다. 교육청 행사를 코엑스에서? 이런 뜻밖이 일이 있다니. 게다가 세계정치학회와 동반하여 열리고, 교육감이 토론자고, 애매한 시간이었다. 뭔가 옹색해졌구나. 민주시민교육은 이미 유행이 지났으니 불평할 일은 아니지.
1부는 정말 애매한 구성이었다. 시민교육을 이야기하면서 죄다 윤리과 전공들이 나와서 발표를 하고, 내용은 이미 10년전부터 한발짝도 못나가고 있는 시민교육이냐 인성교육이냐의 차이였다. 인성교육이란 용어는 전국 각시도교육청에서 주요 정책으로 채택한 '민주시민교육'이 봇물처럼 활성화되고 있을 때, 이를 막아보겠다고 대안적 용어로 내세운 것이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인성교육'은 스스로 시민교육을 포괄하는 단어로 내세워졌고, 진보교육감들이 집권한 시도에서는 교육부 공문을 처리하는 업무 정도였다.
발표를 들어보니, 10년이 지난 지금도 별 의미도 정체성도 없는 거 같았다. 약간 그... 수신제가치국평천하 느낌. 교실 안에서 여혐이 판치고 극우적 사고를 복붙한 발언들이 횡행하는 이 때, 공자와 맹자의 인성교육 덕목을 가르치고 시민교육으로 나아가자는 게 참 현실감 없게 느껴졌다. 이야기하는 사람들조차, 전공학과의 세 확장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하기 힘든 것이었다. 금융자본의 절대화와 세계자본주의 천하에서 덕목의 실천을 통한 시민교육을 외치는 것이 참으로 공허했다. 서울교육청에서 지난 10년 동안 이룬것을 다 날려먹고 있었구나. 시민교육은 개별적 실천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룰, 애티튜드의 문제여야 한다. 이러니 차별금지법 만들기가 그렇게 어렵구나 싶었다.
아이고 의미없다. 전문직이 공부는 하지 않고 남의 손에 판 짜는 것부터 맡기니 결국 이 수준이다. 지난 10년 동안 성장해온 서울교육의 사람들은 하나도 부르지 않고, 낼름 서울대 윤리교육과한테 하청이라니.
그 발표 다음은 2023년 개고생해가며 만든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의 실천사례 발표였다. 아니, 이게 앞의 것들이랑 무슨 연관이 있지? 정말 구조화가 하나도 되지 않았구나. 내가 생각하기에 공존형 토론은 정말 많은 이점이 있다. 학교에서 적용하면 많은 이점이 있다. 초등이나 중학교... 고등학교가 제일 좋겠지만, 고교학점제와 수시입시 체제에서 뭘 얼마나 하겠느냔 말이지. 또 하나 달라진 점은 AI다. 이제 아이들은 자료를 찾을 필요도 없이 모든 것을 AI에게 묻는다. 비교도 대조도 할 필요가 없다. 정말 심각한 문제인데, AI가 완성도를 더할수록 인간은 리더기(READER machine)의 위치가 되어간다. 기계적이고 영혼 없는 낭독자의 위치. 그게 바로 최근 학생들의 수준이다. 내용의 이해는 고사하고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른다. 지적 능력이 계속 저하되는 게 체감된다. 디지털 리터러시를 익히자고 하지만, 과목으로 개설하지 않는 한 고교학점제의 정신없는 굴레 안에서는 실천할 수 없다. 상하의 격차는 커지고, 중하의 수준은 점점 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내가 하고 싶은 질문들을 적고 있는데, 시간이 다됐다며 끝이 났다. 질문도 안받고 말이다.
나의 질문은 이런 거였다.
1. 이00, 여혐, 역차별 발화, 소수자에 대한 공정성 문제 제기 등은 교실안에서 매우 심각하다. 이것이 현대 10대남의 타고난 인성인가 싶을 정도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 인성교육-시민교육의 관점에서 어떻게 다가서야 하는가? '덕목'의 단련으로 교육 가능한 것인가?
2. 교육 '프로그램'을 만드는 문제로 시민교육에 접근하면 단발적이기고 형해화되기 쉽다. 교육실행의 철학적 측면, 사고기반으로서의 민주, 평화, 인권 교육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교육과정과 연결짓지 않을 수 없다. 교육부와 교육청의 업무체계나 고교학저제 교육과정에서는 어떤식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3. 현대사회에서 학생이 학교에서 받는 교육은 그 영향력의 측면에서 30% 이하라고 생각한다. 사회적 교육이 훨씬 더 큰 반향을 줄텐데, 그 측면은 인성교육-시민교육 측면에서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가정교육, 매체교육, 사회정책, 사회 분위기 등)
짜증이 밀려올라오는데, 다음 세션은 국제정치학회의 토론이 있다고 했다. 이제서야 낯선 코엑스라는 장소, 09시라는 말도 안되는 시작 시간이 이해되었다. IPSA(International Political Science Association)의 서울정기총회의 한 세션을 서울시교육청에서 후원하여 참가를 허락받은 거 같았다. 공문에 한 명당 $50의 비용이 발생했다고 하더니 이거였구나. 막 한심한 생각이 들려고 했는데, 듣다 보니 너무 재미있었다.
명확한 주제의식(한국 교원의 정치적 중립성은 타당한가? 교원의 정치적 기본권을 보장했을 때, 학교교육의 편향성 위협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과 다양한 국가의 사례, 정치학자들이 고민하는 정치교육(시민교육)의 내용들이 그동안 정치교육의 타당성을 고민했던 내 생각들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차라리 1부의 맥락도 개념도 의지도 없는 발표들보다 100배쯤 좋았다. 통역 수준도 매우 좋아서 굳이 영어에 동시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들을 수 있어서 더 좋았다. 역시. ... 이런 행사에 교사들이 적극적으로 참석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열심히 아이패드에 메모하면서 들었다.
요즘 교육청 모든 행사에서 토론과 발제의 메인 게스트로 나오시는 교육감(이래선 안된다. 그는 행정직일 뿐이다. 경청하면 될 일인데)이 떡하니 앉아 있는 게 참으로 보기 싫었다. 모든 행사를 재선을 위한 유세현장으로 삼는 거 같기도 해서 보기 민망했다. 그러나 세계의 학자들 앞에서는 자신의 처지를 알고 입을 다무시는 듯. 몇마디 안하셔서 좋았다. 그럴거면 그냥 청중으로 들으셨으면 경청하고 학습하는 모습으로 좋게 보였을 것인데. 스타병이 안타까웠다.
내용들을 내 질문들에 대한 답으로 정리해보았다.
1. 교사의 정치활동 금지. 이대로 시민교육이 가능할까?
- 학생의 정치적 기본권은 확장되는데 교사의 정치기본권은 완전히 제한되어 있다. 이는 피아노를 못치는 사람이 피아노를 가르치는 격이다.(무지한 스승이 될 수도.ㅎ) 교과서만을 이용한 정치교육은 실제 시민의 양성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 정치적 의견개진, 정당활동을 통한 집단적 의견표출,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정치적 의견개진과 활동은 허용되어야 한다.
2. 교사의 정치기본권 보장과 수업에서 '균형'을 갖는 것에 대하여
- 학생들은 교사의 말에 영향을 받는다는 자명한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수업에서 교사의 정치지향을 표출하는 것은 자제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스스로 무엇을 생각하는가에 대해 자유롭게 설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시민교육이다.
- 수업 중 교사의 '강요'는 엄격하게 금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교사의 정치기본권 자체를 국가가 금지하는 것은 교사를 성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므로 해서는 안된다. 이는 모든 성인이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고 행동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민주주의'의 기본 전제부터 어긋나는 것이다. 어떻게 교육이 가능한가?
- 정치적 기본권은 모두 허용하되, 교실 안에서, 학교 안에서 '어떻게' 가르칠지 교육을 제공하는 것과 원칙을 만들어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 교사의 직업윤리 문제다. 교사는 사회를 더 좋은 상태로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 직업윤리다.
3. (내 생각) 우리나라의 민주시민교육은 사실 의도성이 너무 강한 채 출발했다. 문제는 없는가?
- 누구나 어떤 정치성향이든 가질 수 있고, 바꿀 수 있음을 일단 인정해야 한다.
- 극우의 입장을 가진 것도 일단 공존의 대상이다.
- 시민교육은 민주적 스킬, 민주적 태도를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지, 특정한 정치성향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 '공공의 이익'(공공선, 공동선)을 이끌어내는 것이 교육의 목적임을 잊지 말고, 교육은 결국 국가와 사회를 위한 것이므로 이 부분을 적극적으로 보호해주어야 한다.
4. 교사의 침묵은 중립이 아니다.
- 오히려 교사의 답답함이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 교사가 정치적 논쟁 이슈에 깨어 있어야 정치적 중립성(사고 가능성)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다.
- 교사의 권리와 책임감 간에 균형을 잡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수업시간에 꼭 지켜야 할 것들을 발굴하고 공유하는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
5. 각국의 교사 정치적 권리
- 호주: 선거시기에 선거를 수업에서 적극적으로 다룰 수 있다. 그러나 선거결과에 대한 부정(논평)은 할 수 없다. 그런 경우 사임해야 한다. .
- 에스토니아: 교사가 지방정치에 피선거권을 가짐(당선시 교사 사임), 그러나 교사가 너무 바빠서 참여는 쉽지 않음
- 영국: 지방마다 다르지만, 출마하려면 사임해야 함. 선거가 다가오면 실제 자료들을 가지고 선거관련 교육이 많아짐
- 노르웨이: 선출되면 사임한다(강요는 아니지만 바빠지므로 사임한다). 교사가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문제가 되고 있다.
- 아일랜드: 고교교사가 정치인인 경우가 많음(시간을 내서 출마, 활동 가능) 수업시간에는 언급불가. 파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할지라도 학생에게 주장을 전달할 수는 없음. 정치활동을 하면서도 학교내 교육 규칙을 잘 정하면 충분히 활동할 수 있음
- 독일: 위의 것 다 가능
6. 역사교육을 통한 민주시민교육
- 오히려 민감한 측면이 있음
- (Alison)미국 남부와 북부의 내전 역사교육의 내용이 완전히 달랐음. 모여서 대화를 나누도록 유도하는 것이 중요하고, 원하는 것을 모두 교과서, 텍스트북에 넣을 수는 없지만, 꼭 다루어야 할 것들을 함께 도출할 필요 있음. 하나의 주제 이슈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의 견을 논쟁적으로 다룰 수 있는 주제 선택+보충교재+가이드라인 세트로 만들어가는 게 좋음, 서로가 '나쁜 의견' 이 아닌 '다른 의견'을 접하고 다룰 수 있는 게 중요
- (남아공) 국가를 절대선으로 생각하는 관습을 버려야 함. 국가의 오류를 다룰 수 있어야 함. 다양한 의견과 협력, 다름에 대한 태도를 연습하는 것이 중요, 적극적인 이행기 정의 다루기
- (독일) 독일에서 정치교육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68혁명 이후가 되어서야. 80년대 중반 이후 활성화되어 기반을 마련하기 시작. 보이텔스는 이론적인 합의일 뿐. '추상적'이어서 오히려 큰 의미를 지님.
하네스 모슬러. 이분 너무 매력있다.
https://youtu.be/MkQ8Kwokbro?si=K7w_nDK5yO-gFcn2
7. 글로벌 시민교육 - PC(political correctness), WOKE, 르상티망에 대해 고민해야
- (글로벌) 시민교육은 중요하지만 역효과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함.
- 용어에 집착하면 안됨. 국제적 문제들, 한국가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임을 인식시키는 것이 우선
- "너희는 희생과 헌신해야 해, 세계평화와 기후위기 극복을 위해 살아야해!"라는 식의 접근은 매우 위험하다. 우리가 겪는 문제가 우리끼리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므로 협력하고 참여해야 한다는 점을 인식시켜주어야 함
- '초연결사회'를 인식시킬 필요가 있음. 교과서의 다양한 주제, 삶에서의 다양한 이슈들을 다룰 때 꼭 철학과 옳음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음
8. 아이들이 보수주의자가 되면 어쩌지?
- 우리가 길러내려는 것은 보수주의자도 진보주의자도 아닌 '시민'
- 실패를 포함해야 함. 어느 부분에서 실패했는 가를 성찰할 수 있으면 됨. 어떤 국가도 완벽할 수는 없음.
- MUN(모의유엔)과 같은 일종의 롤플레이 경험이 좋음. 세계적 차원과 지역적 측면을 연결할 수 있음. 자신의 역할을 고민하고 그것을 통해 다른 학생을 가르칠 수 있음. 방글라데시의 여성, 한국의 이십대남 등이 되어 입장을 세워보는 경험.
- 정보 리터러시 교육 매우 중요함. 젊은 남성들의 극우화는 세계적 문제
- 규제는 현실적으로 어려움. 분별력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
... 교육계가 아닌 정치학계의 시민교육, 정치교육 논의가 매우 즐거웠다.
병가 기간 중 외로운 늑대처럼 여기저기 국제 심포지엄에 찾아다닐 수 있으면 좋겠다.
신나게 공부하고 코엑스를 좀 헤맬까 하다가, 환자로서의 나의 본분을 깨닫고, 하동관 분점에서 곰탕 한그릇 먹고, 하동관 곰탕 좋아하는 우리집 남자들을 위해 포장까지 해서 집으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