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갈을 보니 마티스가 그리워졌다

시온주의와 이스라엘은 잠시 넣어둬

4월에 얼리버드로 구매해둔 샤갈 특별전의 티켓 만료일이 7월13일임을 확인하고 맘이 급했다.

뭐? 3일밖에 안남았다고?

최근 우리나라의 미술전시회는 발전을 거듭했고, 미술관에 오는 사람들도 정말 많아서, 욕심나는 전시회 얼리버드가 뜨면 바로 구매하지만 틈을 내기 어려워 포기하고 환불하거나 기한이 지나 버려지는 경우도 꽤 많았다. 주말에나 시간을 낼 수 있지만, 그 큰 예술의 전당이 바글바글한 틈에 끼는 게 너무 싫다. 시간이 없어 차를 가져가면 주차에 한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앗싸. 나는 병가중. 운동삼아 전철로 다녀왔다. 티켓 만료 하루 전이었다.


평일 예당은 예전처럼 여유가 넘치지 않을까? 기대하며 9시 30분쯤 도착해 테라로사에 들어갔다. 교육청에 근무할 시절 머리가 복잡하거나 우울하면 들르던 테라로사의 아침은 참으로 한적했는데. 레트로풍 잔에 담긴 커피 옆에는 암, 뺑드쇼콜라가 있어야 제격이지. 25년쯤 전 프랑스 여행에서 처음 이 빵을 먹어보고 이렇게 맛난 빵이 있다는 사실에 약간 문화쇼크를 받았었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의 최고는 단팥빵 아니면 슈크림빵이었으니까. 환자로서 밀가루와 빵은 최대한 자제하지만, 이럴 땐 또 먹어줘야지.

한시간 정도 여유를 즐기다가 미술관으로 갔다. 웬걸. 얼마나 사람이 많으면 대기순번까지 뽑아야 한단 말인가. 대기 등록을 하니 내 앞으로 131명이란다. 아이고야. 그래도 커피를 마셨으니 만족.


기획전의 제목이 심상치 않다. 비욘드 타임. 이거이거... 아무래도 2차 대전 이야기가 나오고야 말겠군.

전시실에 들어섰는데, 사람이 바글바글, 좁은 전시장에는 샤갈의 소품들이 빽빽하게 걸려 있어 한발짝을 내딛기도 힘들었다. 라퐁텐 우화의 삽화들은 스킵스킵, 난 몇년 전에 본 큰 그림들이 목표란 말이다.

이번 전시의 특이점은 종교화들을 많이 들여왔다는 점이었다. 유대교 성서를 바탕으로 한 다양한 삽화들이 있었고, 출애굽을 주제로 한 그림들은 특히 더 많았다. 엄격한 시온주의 가정에서 자란 샤갈이니 저런 그림을 그릴 때 얼마나 마음이 저릿저릿 했을까 싶다. 2차 대전의 핍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까지 했던 그의 슬픔과 울분이 반영되어 있을테다.


그래도... 이런 글은 너무하지 않나? 뒤러와 홀바인에 의해 유대인 형제들이 화장터로 끌려갔다니. 깜짝 놀랐다. 여기에 맞춰 2차 대전 당시 유대인 홀로코스트와 관련된 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아놔. 이건 아니지.

지금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와 이란을 폭격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있는데, 2차대전 영상을 틀며 샤갈의 어려움에 관객이 동일시하게 유도하는 건 진짜 아니지. 큐레이션할 때 조심했어야 할 거 같았다.

이스라엘 대사관이 막 협찬한거 아냐?(찾아보았으나 표면적으로 그러지는 않은 거 같다)

미국으로 망명한 철학자, 예술가, 과학자들과 교류하며 생명을 지켰다는 안도감과 민족에 대한 죄스러움으로 갈등했을 샤갈의 마음은 십분 이해한다만. 굳이 이런 글을 게시한 것은 좀 ,..


유대교 12지파의 상징을 새겨둔 모자이크. 관객들은 유대교와 기독교를 헷갈리며 감상하는 중. 유대교에 대한 설명이 좀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이번 전시의 메인은 예루살렘에 있는 하다사 메디컬센터 회당에 있다는 샤갈이 그린 스테인드글라스를 몰입형전시로 재현해둔 전시실이었다. 예배당 의자까지 동원하며 꾸며둔 전시실은 좋았다. 유대교 12지파의 상징물을 주제로 한 12개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벽에 비춰지고 있었다. 실제 모습이 궁금해서 찾아보니 이런 모습이었다.

https://youtu.be/gWMWcRbrZ_o?si=AjMN2WqmP

예루살렘 하다사 메디컬 센터의 샤갈 윈도우

샤갈의 작품에서 환상적으로 등장하는 소, 말, 양 등의 동물도 유대교 12지파의 상징에서 영향받았음을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 언제나 정치적 상황의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라, 2차 대전, 홀로코스트, 출애굽 등과 연결된 샤갈전이 썩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나 예술작품을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 샤갈의 색채와 자유분방한 선은 천재의 것이니까.

이번 전시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흑백의 리소그래피들(판화의 일종이라고 함) 1950년대, 벨라가 죽고 혼자 살 때 남긴 것들인 거 같다. 동양적인 느낌이라서 그런가? 좋다

이번 전시의 역점은 샤갈의 화려한 색채가 만발한 꽃그림들을 방 하나에 잔뜩 모아두었다는 점.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샤갈의 꽃그림은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리고 그 옆엔 꼭 사랑하는 연인의 모습이 있다. 자신의 뮤즈 벨라를 그렇게도 사랑했다고 하더니.

다녀와서 이리저리 찾다보니, 샤갈을 비롯한 예술가들(특히 내가 좋아하는 막스 에른스트), 한나 아렌트와 벤야민 같은 철학자들을 미국으로 망명시키는 데 앞장선 단체가 있었다. IRC(International Rescue Committee) 라는 단체였고, 넷플릭스에는 2차 대전 긴급구조를 소재로 한 영화도 있었다. 오호. 봐야지.

https://www.rescue.org/kr/article/true-story-behind-transatlantic-and-irc

https://www.netflix.com/kr/title/81473474


내 그림 애호 이력도 변화한다는 걸 느꼈다.

10대 때는 로댕의 작품에 빠졌고, 20대 때는 들라크루아의 역동성을 좋아했고, 30대 시절엔 화려한 걸 좋아해서 클림트를 사랑했고, 라파엘전파의 선명한 그림이 좋았다. 40이 넘자 피카소의 그림들이 눈에 들어왔고 베를린에서 막스 에른스트를 알게 되며 초현실주의의 매력을 인지했다. 몇년 전부터는 선은 단순하고 색채는 선명한 마티스를 찾아다닌다. 지난주에 본 강요배의 허공과 나무는 아직도 자꾸만 맘에 그리게 된다.


그림을 좋아하게 되어 다행이다. 미술관이라는 공간이 주는 고독이 좋다.

특별기획전에는 고독감이 없어서 영 파이다. 다음주엔 현대미술관에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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