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수무강을 위하여

신장암과 신장병은 다른 거지?

아침 스트레칭을 마치고 사바아사나 명상을 하고 하늘을 보았다

아직도 5시면 눈이 떠진다.


명목상은 고3이지만, 빡센 수험생 시절을 보낸 내 눈에는 그저 인생을 즐기는 10대로밖에 보이지 않는 아들이 방학을 했다. 고3이 방학이 무슨 상관?이라고 생각하는 나와 터지하지말라는 아들은 가끔 부딪힌다. 가끔인 이유는, 내가 잔소리와 언어폭력을 가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늘 "빡세게 할거야"를 외치지만 실상은 여유가 넘치는 황금돼지띠 수험생은 아직 현실을 모르는 것이지. 그 엄혹하고 냉정한 현실을. 스스로 알게되는 때가 와야 변하거나 적응할 것을 알기 때문에, 그냥 둔다. 적절한 좌절을 겪게 하기 위해서. 속이 터지지만. 나도 물론 오랜 시간 그걸 바꿔내기 위해 어르고 달래고 혼내고 돌직구 던지고 다 해봤다. 그러나 안된다. ㅎ 꿈은 높으나 현실은 선진국의 여유있는 청소년인 아들이다.


제대로 해보지도 않았으면서, 끝까지 가보지도 않아놓고, "이 길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한다. 그러나 어차피 너의 인생. 너는 너고 나는 나다.



그런 아들과는 달리, 나는 문제가 있으면 책부터 산다. 7월10일부터 병가를 쓴 후에, 사실 학교 일에서 놓여났다는 기쁨이 너무 커서, 완치율이 높고 재발률은 낮다는 신장암 1기쯤은 크게 신경이 써지지 않았다. 병가 첫날 가장 먼저 한 일은 휴대전화를 무음으로 만든 것이다.

교감이라는 자리는 내가 잘한다고 되는 자리가 아니어서, 언제 어떤 일로 전화나 문자 연락이 올지 모른다. 학부모, 학교, 교사, 장학사 등, 내 일로 오는 연락은 모른체 했다가 다음날 연락하고 해결하면 되지만, 다른 사람이 만든 급한 사고나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는 연락이 오는 것은 안받을 도리가 없다. 그 당사자나 조직에 직결된 영향을 주게 되므로, 가장 빨리 해결에 나서는 게 급선무다.

정말, 10년만에 마음이 홀가분하다. 방학 중 며칠 연가를 쓸 때도 놓지 못했던 노트북을 펼치지도 않았다. 병가를 내니 모든 결재를 대결로 돌릴 수 있었다. 공문도 나에게 오지 않는다. 소식을 들은 사람들에게 전화가 오지만, 받지 않거나, 무음상태로 혼자 울리다 꺼진다.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들에게 너무 고맙긴 하지만, 참 애매한 상황이 만들어진다. 전화를 하거나 암에 대해 걱정하는 유형들이 좀 있는데, 가장 많은 것은 금방 울음이라도 터질 듯 걱정하는 것이다. 이럴 때는 도리없이, 내가 그를 위로하는 처지가 된다. 쾌활하게 웃으며, 신장암 1기는 암도 아니래요. 완치율을 90프로고요, 재발율은 10프로 미만이래요. 항암도 안한대요. 저는 오히려 오랜만에 쉬어서 정말 좋아요. 쉬는 동안 몸 관리 잘할거에요. ... 이런 식이다.

위로나 응원을 문자로 보내는 사람들도 많다. 전화를 하고 싶겠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걱정되었을 거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문자나 톡을 또박또박 적어보낸 사람들은, 정말 적절한 대응이다. 싶다. 바로 답문자를 보내는 것도 어려워서, 한참을 생각한 후에, 내 마음을 짧게 적어 보낸다. 그리고 고맙다.고 한다. 기도할게요, 응원할게요, 별일 없을 거에요, 건강 잘 챙기시고 치료 후에 꼭 봐요.

카카오 선물하기로 이것저것 좋은 것들을 보내기도 한다. 고맙게 받지만, 맘은 좀 부담스럽다.

제일 싫은 건, 자기가 나서서 '신장암은 암도 아니래요. 1기면 완치가 거의 백프로라던데? 내가 아는 누구도 신장절제수술했는데, 회복도 빠르고 복귀도 금방 했어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정말 싫다. 지금 내가 빠진 혼란이나 착잡함을 겪었을 그 사람이 불쌍하다. 누구 맘대로 별거 아닌 암이냐는 말이다. (이 이야기를 했더니 국선이, '밀양'이냐? 라고 했다. 영화 밀양. 너무 적절한 비유라서 깜짝 놀랐다. 얘는 진짜 이런 표현을 너무 잘한다. )

나보다 나이가 많은 선배나 퇴직한 분들은 전화를 해서 먹고 싶은 거 사주겠다고, 자기는 카드를 들고 나갈테니, 원하는 것을 먹자고 한다. 고기를 사준다, 한정식을 사준다, 어디로 갈래? 하는 분들도 많다.

뭐니뭐니해도, 스스로 암진단과 수술, 회복의 과정을 겪어본 환우들의 위로가 가장 현실적이다. 검사는 어디에 가서 하고, 무엇을 먹고, 무엇을 조심해라. 확실하게 알려준다. 동병상련은 힘이 세다.

... 위로와 응원이 무엇일까. 어떻게 해내는 것이 가장 좋은 걸까. 이번 기회에 생각을 좀 했다.

휴식의 즐거움 속에 열흘의 시간을 보냈다. 5시면 눈이 떠지는 습관을 고쳐보려고, 애써 침대에 누워있어보려 했지만 오히려 힘들어서, 눈뜨면 일어나 아침요가를 20분 정도 하기로 했다. 정릉 산책을 가고 싶지만, 너무 번잡스럽게 1시간 넘게 뭔가를 하는 일은 아직 마뜩치 않았다. 요가를 마치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바아사나로 누워 20분쯤 명상음악을 듣는다. 그러고 일어나 아침을 먹고 아들 학교 가는 걸 돕는다.

오전엔 운동 겸 여기저기 다니기로 했다. 서울의 북쪽끝에 쳐박혀 있느라고 누리지 못한 서울살이의 즐거움을 적극적으로 누릴 생각이다.

월요일에 병원에서 수술전 검사와 수술날짜, 입원날짜를 확정하고 왔다. 그러고나니 현실감이 좀 들었다. 돌아와서 신장암 전문 의사들의 진지한 유튜브 영상들을 찾아보고 특히 음식 조절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오늘부터는 본격적으로 신장암에 대한 정보와 신장절제술 후의 생활에 대해 공부하기로 했다. 어제 주문한 책이 와서 읽었고, 관련해서 다양한 정보를 유튜브에서 찾아보는 중이다. 하지만 신장암과 신장병은 너무 달라서, 이후 건강관리 방법도 꽤나 다른 거 같다. 의사샘과 상의를 좀 해봐야겠다.

비만은 안돼! 당뇨 고혈압도 안돼! 짜게 먹지 마! 이런 이야기만 듣다가, 신장절제 후 신장의 부담을 줄여주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듣고, 신장병(신부전 등) 환자의 음식 관리까지 알게되었다. 너무도 특이한 것이, 당뇨 고혈압이 무서워 작년부터 식단에 변화를 주고 운동도 열심히 다녔는데, 신장병은 내가 해오던 것을 하면 안되는 거였다. 채소 과일을 줄이고, 흰밥을 먹고, 고기를 끊고, 인이 많은 요거트도 안되고... 어? 이상한데? 이거 맞나? 역시 의사샘과 상의하기로 했다.

암진단을 받을 즈음 존경하는 우치다 센세의 책 3권을 샀다. 그 중 제목이 너무 맘에 드는 게 <목표는 천하무적>이다. 재밌게 읽었다. 사랑하는 후배교사님들도 걱정과 응원의 문자를 보내주고 있다 너무 고맙다.

둘째 아들이 안필드의 푯말(이런 걸 뭐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다)을 팝업스토어에서 거금을 주고 사왔다. 방문에 붙여두었다. You'll never walk alone. 이 문장이 너무 좋아 팬이 된 리버풀. 그들의 플레이도, 리버플 팬들의 애정도 바로 이 문장과 같다. 나도 학교에서 교감일을 할 때 늘 맘 속에 새겼던 문장이기도 하다.


10여년 간 언제라도 어떤 문제라도 함께 토론할 수 있고, 내가 하는 일에 기꺼이 날카로운 의견그룹이 되어 주었고, 나의 개인적 어려움을 함께 니눠주었던 사람들 10명이 있다. 이들이 나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나도, 혼자 걷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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