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과를 갔어야 했는데... 마이크로바이옴이나 챙기자
고등학교 때까지 수학과 과학에 젬병이었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런 걸, 궁금하지도 않은 걸 공부해야 하는지 납득이 안되었다. 시와 소설을 읽고 사회를 알고, 역사를 들이파는 게 진정한 학문이라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그런 게 더 재미있었다. 사실은 최근까지도 이런 환상에 빠져 살았는데, 교양과학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3년쯤 전부터 깨달았다. 내가 수학과 과학을 싫어했던 것은 다 교육방법의 문제였다는 것을. 유튜브의 저 친절하고 깊이있는 과학자들처럼 내게 수학과 과학에 다가설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면 나는 절대 문과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웬만큼 아파서는 병원에도 잘 가지 않던 내가 암진단을 받고 전신마취라는 무시무시한 처치와 로봇보조수술이라는 비싼 수술을 받고 극심한 고통에 빠졌다가, 3주만에 이렇게 멀쩡하게 생활할 수 있게 되는 과정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과학, 그리고 의학, 궁극적으로는 인체의 구조와 치유력에 감동하며 그 신비로운 시스템을 알고 싶어졌다. 이래서 아동기에 아팠던 아이들의 꿈이 의사나 간호사가 되는가 싶다.
7월에 물을 끓이다가 팔뚝을 수증기에 데었다. 뭐든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성향 때문에 맑은 액체가 줄줄 흐르는데도 병원은 커녕 약국도 찾아가지 않고 3일 정도가 지났었다. 사실 우리 동네에 피부과는 많은데, 죄다 미용시술을 하는 곳이라 화상치료는 어디로 가야할지도 잘 모르겠더라. 3일 째 되는 날 심각성을 느껴서 약국에 찾아갔더니(토요일이라 병원이 다 닫아서) 약사 선생님이 너무 놀라며 처치를 해주셨다. 화상연고와 항생제와 바이오덤을 챙겨주시며 3일 정도 잘 신경쓰라고 했다. 5일을 시키는 대로 했더니, 너무나 놀랍게도, 반창고를 갈아주는 때마다 상처가 눈에띄게 단계적으로 회복되는 게 보였다. 움푹 패였던 곳이 서서히 한 단계씩 원상복원되는 걸 보고 내 몸인데도 감동했었다.
어떤 원리인지 너무 궁금해서 자료를 찾아보다가 넷플릭스에서 일하는 세포를 보게 되었다. 한때 나의 히어로였던 사토 다케루가 사무라이 켄신의 몸가짐을 지닌 백혈구로 나와서 한참 웃었다. 내 몸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전력을 다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나의 세포들이 그제서야 실체로 느껴졌다. 한동안 암종과 싸우느라 나의 세포들은 비상상황을 겪었을 거다. 그것도 모르고 개인 병원이나 가보려 했다니. 세포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그래서 더욱 더 힘을 내서 잘 자고 잘 먹고 운동을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
수술을 받고 요양병원에서 지내면서, 또 너무 신기하고 궁금했다. 피부를 절개한 곳은 어떤 원리로 다시 복원이 되는 걸까? 신장의 1/3을 절제했다는데, 신장은 원래 뭘 하는 곳이고, 그 원리는 뭐지? 신장을 절제하면 그 부분의 기능은 어떻게 되는걸까? 어떻게 그렇게 심했던 통증이 날이 갈수록 눈에 띄게 줄어드는 걸까? 병원에서 처방한 약은 어떻게 의사샘이 말씀하신 대로 정확하게 48시간만에 효과를 낼까? ... 나의 무지함의 크기만큼 궁금한 것들도 많아졌다. 다행히 나같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일본 책들이 번역되어 있었다. 냉큼 한권 주문했다. <인체 구조 교과서 - 내 몸에 생긴 질병을 해부학적으로 알고 싶을 때 찾아보는 인체 의학 도감>
집에 와서부터 조금씩 보고 있다. 알면 알수록 신기하다. 인체. 시리즈 모두 욕심나지만, 차차.
요양병원에 있으면서 암환자 치료식에 대한 설명을 유튜브에서 많이 찾아 봤다. 실제 최근 발표된 논문들이나 장기간 연구성과들을 바탕으로 근거를 가지고 설명해주는 유튜브들이 믿음이 가서 많이 봤다. 그래서 머리속으로 식사 루틴을 정해두고 퇴원하면서 실천 중이다.
사랑하는 토마토와 마늘을 듬뿍 넣은 에그인헬은 빵에 얹어 먹어야 제맛이지만, 빵 대신 채소에 얹어먹는 것에 익숙해지는 중이고, 찐 단호박에 찐 당근조각 몇개, 아몬드 5알, 물 넣고 갈아서 렌지에 3분 돌려 먹는 단호박 스프도 쌀쌀해진 날씨에 안성맞춤이다.
아침에 찐 야채들을 그냥 먹자니 너무 심심해서, 주로 그릭요거트나 바질페스토에 조금씩 찍어먹었다. 그러다 남편이 어디서 후무스를 먹고 와서 이야기를 하길래 호치민에서 맥주 안주로 애용했던 후무스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병아리콩을 삶고 올리브오일, 참깨, 레몬즙, 마늘, 물을 좀 넣어서 갈았다. 마늘을 반만 넣을걸 하는 후회를 하긴 했지만, 정통 후무스에 비해 오일을 좀 덜 넣어서 부드럽기가 좀 덜하지만, 성공했다. 채소에 찍어 먹으니 식감도 좋고 단백질도 먹을 수 있어서 만족감이 높다.
채소를 많이 먹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는 참 어려운데, 마이크로바이옴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스스로 납득이 되었다. 30조 개가 넘는 다양한 마이크로바이옴이 인체에서 정말 다양한 역할을 하는데, 단지 변비를 예방하는 것 뿐 아니라 질병을 통제하고 치유하기까지 한다. 이 마이크로 바이옴이 인체 내에서 다양성을 유지하며 살아가야 하는데, (아, 다양성의 중요성이란.), 이들이 에너지원으로 삼는 것이 바로 대장까지 도달하는 식이섬유라는 거다. 대부분의 영양소들은 소장까지 가는 동안 인체에서 소비되거나 저장되기 때문에 식이섬유만이 온전한 성질을 유지한채 대장에 도달하고, 덕분에 마이크로바이옴이 유지될 수 있다는 거다.
아... 대체 인간을 만든 것은 누구인가. 이토록 아름답고 신비로운 우주는 신만이 만들 수 있었을까? 지금 잡고 있는 책 2권(우치다 센세의 마지막 강의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을 끝낼 때까지만 참자.
일하는 세포들 원작 만화도 사고야 말겠다.
고맙고 소중한 나의 몸이여.
(식생활 교육도 좀 달라져야겠다. 우리 청년들이 죽어가지 않게 하려면. 대체 학교에서는 왜이렇게 쓸데 없는 것들만 가르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