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사생활과 나의 정신건강을 위해

무점착 시트지의 놀라운 기능

(한시적으로) 돌아올 큰아들의 방은 우리 모리 방으로 쓰던, 주방에 딸린 작은 방이다. 문이 유리 미닫이여서 영 마음이 불안했는데, 돌아오기로 한 날 이틀 전, 급히 '무점착 시트지'를 주문했고, 하루만에 받았다.

옛날에 써봤던 유리시트지들만 생각했더니, 무늬도 세련되고 과하지 않아서 주문했는데, 무엇보다 물을 뿌려 붙이는 무점착 시트지라니 다행이다. 재단까지 정확하게 해서 보내주니 편하기까지.

붙이고 나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나의 정신건강을 지켜줄 무점착 시트 시공, 집안일 분배 구상, 나의 마샤.

눈에 보이면 잔소리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싸우게 되고, 나는 날마다 후회와 책임감에 시달리게 될 터.

너의 사생활을 보호하는 동시에(아니, 오히려 더) 나의 정신건강을 지키기 위한 탁월한 선택이었다.

몇번을 오가며 젊은 남자 자취방 냄새를 풍기는 옷보따리들을 갖다 쌓아두길래 세탁기와 건조기를 몇차례 돌렸다. 한참 전부터 고민하던 집안일 분배 계획도 자꾸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요즘 신나게 보던 스하클이 세미 파이널부터 요상해지더니, 역시나 나의 최애 베이시스트 마샤는 파이널 직전에 하차했다. 밴드음악이라고 하기엔 한참 모자란 곡들로 파이널을 하겠다고 설치는 걸 보고는 시청을 그만 뒀다. 결국 젊은 뮤지션들 경쟁시켜 팀이 아닌 개인의 인기투표 결과에 따라 미소년 밴드를 만드는 게 엠넷의 목표였던 것이다.

하차한 마샤가 이틀 후 바로 도쿄 라이브클럽에서 원래 팀으로 공연하는 짤을 인스타에서 보고는, 아, 그렇지. 이런게 음악이지 싶어서 무조건 응원하기로 했다. 팀 이름이 꽤나 거창했고(思想に溺れた夜, 사상에 빠진 밤), 음악은 참 좋더라만 보컬이 조금 성에 안차는 밴드였다. 기회가 되면 공연을 보러가고 싶다.

돌아온 큰오빠의 손길에 대만족 중인 우리 모리

아들과의 집안일 협상은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아들이 좋아하는 운동을 할 수 있도록 체육관비용을 내주는 대신, 내가 하라는 건 무조건 하기로 노예계약을 맺은 것이다. 초반에는 한참 싸우겠군... 싶었던 생각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특유의 친화력과 유연함과 유머로 큰 무리 없이 약속을 지켰고, 나도 별 마음의 부담이 없어졌다. 오히려 오랜만에 돌아온 아들에게 좋은 음식을 먹이고 싶어져서, 간단하게라도 음식을 해주고 있다.

몸과 운동에 관심이 많은 녀석이라 내가 먹는 음식과 비슷한 음식들을 좋아해서 더 좋다.

놀랍게도 뭔가 든든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생겨서 재미도 조금 있다.

다시 나의 루틴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평화재건에 안도하며, 아껴둔 제로맥주 한잔. 그림도 다시 그리기 시작. 나는 색칠보다는 스케치하는 시간을 좋아한다는 깨달음. 꽉 채우지 않기로 했다. 그분이 보내주신 에그타르트.


오히려 요즘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둘째 아들이다.

작은 아들 앞으로 병무청에서 드디어 입대 관련 문서가 왔다.

도쿄에서 돌아온 후 아들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다. 아침에는 늦게까지 자느라 허둥지둥 집을 나가서는 당최 들어오지를 않는다. 용돈은 조금씩 더 달라기 일쑤고, 오늘은 학교 친구, 내일은 캠프 친구, 그 다음날은 베트남 친구, .... 친구가 많은 만큼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너무 많다.

도쿄에서 들고온 슈트케이스도, 친구들이 생일선물로 보내준 크고 작은 택배상자들도, 정리하지 않고 쌓여있는 온갖 수험서들도, 그대로 먼지만 쌓여가고 있다.


12월 24일 인생 첫 콘서트 관람을 간다고 해서 축하해줬다. (세상에, 내가 20대때 좋아했던 크라잉 넛과 노브레인의 공연이라니.ㅎㅎㅎ 드럭에서 만났던 20대 그들을 내 아들이 지금 좋아하는게 신기함)

그날 이런 저런 일이 있었다. 아들이 비밀로 해달라고 해서 말은 할 수 없지만.

드디어 필라테스에 복귀했다. 월, 수, 금 세번만에 허벅지와 엉덩이가 터지고 있다. 나아지겠지. 24일 밤 운동하고 돌아오는 길의 달이 예뻤다.

합격자 발표가 있는 1월까지는 불안하고 아무것도 손에 안잡히겠지만, 너무 가족과 집에 소홀한 거 같아서 슬슬 화가 나려는 중이다만. 조금 더 참아봐야지.

돌아온 아들과 떠나려는 아들. 그 중간의 엄마가 참 할 일이 많다.


내일은 하루 종일 큰 아들 자동차 업무를 처리해야 한다.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