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육식동물과의 일상

어? 이 녀석, 나를 닮았잖아!

큰아들의 질주본능 편력


내가 베트남에 있는 동안 나의 프라이드는 아들의 것이 되었다. 소유자는 나이지만 실제 운전자는 아들이었고, 한창 양아치들의 튜닝에 맛을 들인 녀석이 나의 차에 갖가지 장치를 달고 꾸몄다. 귀국해서 만난 나의 뉴프라이드는 원래 그레이가 아니라 무광 블랙이었고, 오토바이 같은 굉음을 낼 수 있는 장치가 있었으며, 내부에는 네온사인같은 불빛이 반짝였다. 자동차 정비를 배운 아들은 나는 이름도 잘 모르는 장치와 설비들을 나는 경로를 잘 모르는 중고 거래를 통해 바꾸거나 설치했다. 가끔 카메라에 찍혀 날아오는 과속 딱지를 보면, 가끔은 과속주행도 즐기는 듯 했다. 공무원인 엄마 앞길 막는다며 잔소리를 해대서 점점 그 수는 줄어들었다. 그래도 10대 때처럼 오토바이를 타고 인천대교를 질주하다가 경찰차의 추격은 받지 않으니 다행이었다. 그땐 하루하루 걱정이었다. 잔소리로 말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워낙 시골의 학교를 다니느라 차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여서, 2007년식 뉴프라이드가 수명을 다하고 나서도 낡은 액센트 한대를 (내 돈으로) 다시 사서 또 자기 수준에 맞게 고쳐서 타고 다녔다. 그래도 나이가 들었다고 양아치흉내는 내지 않고, 엉뜨를 설치하거나 속도계를 더 달거나 네비게이션을 다는 정도였고, 과속 딱지도 사라졌고, 가끔 하이패스를 카드잔액부족으로 무단통과하는 정도였다. 워낙 운전을 좋아해서 친구들을 태우고 전국을 돌아다니는 거 같았다. 바다도 사랑해서 툭하면 바다를 보러 그 낡은 액센트를 끌고 다녔다. 다행히 운전에 관한 한 원칙주의자여서 위험한 짓은 절대 하지 않았고, 한번도 사고를 내지도 않았다.


이번에 집으로 들어오면서는 그렇게도 사랑하는 자기 차를 둘 곳이 없어 할머니네 아파트에 맡겼다. 서울에서 차를 가지고 다니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 정도는 아는 나이라는 거다. 이것도 엄청 긴 고민 끝에 결정하면서, 자기에게 도파민은 운전인데, 그를 대체할 것이 필요하다며 모은 돈에서 200을 떼어 오토바이를 사왔다. 나도 오토바이를 배우겠다고 했더니, 위험해서 절대 안된단다. 위험한 건 아는구나. 헬멧도 튼튼한 걸로 사왔다.

아기때부터 자동차 장난감을 그렇게 좋아해서, 주차장을 그려 놓고 자동차를 배열하며 놀더니만.

오토바이를 등록하며 보험이며 서류, 번호판 업무를 같이 처리하면서 남을 대하는 태도와 노련함을 보니 큰아들이 진짜 어른이구나 싶었다. 17살에 집을 나가 오토바이 배달을 하던 위태로운 소년은 이제 자신의 이름으로 된 차와 오토바이를 관리하고, 책임을 고민하는 청년이 되어 내 곁에 돌아와 있다.


"Out of sight, Out of mind"


고등학교 문법 책에서 외운 예문이었던 거 같은데, 진짜 그렇다. 보지 않으면 편해진다.

아들이 돌아오기 이틀 전 급하게 붙인 '무점착 시트지'는 기대 이상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 유리 미닫이문 너머로 삐져나오던 아들의 어수선한 삶의 흔적들이 반투명한 시트지 뒤로 숨었다. '보이지 않으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은 잔소리를 줄이는 데 특효약이었다. 시각적인 경계가 생기니 녀석의 사생활은 보호되고, 나의 정신 건강도 안녕을 찾았다. 우리는 그렇게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한 지붕 아래 두 성인으로서 각자의 삶을 영위 중이다.


의외로 우리의 생활 패턴은 꽤나 닮아 있었다. 아침이면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함께 식탁에 앉는다. 나는 평소 즐기던 야채 식단을 차리고, 아들은 직접 닭가슴살이나 참치 같은 단백질을 요리해 곁들인다. 건강을 챙겨주고 싶은 엄마의 걱정은 버릴 수가 없어서, 슬쩍 채소를 접시에 얹어주면 아들은 아~ 됐는데. 하면서도 먹는다. 서로 자기 밥을 먹고, 식사 후에는 아들이 약속대로 설거지를 도맡는다. 작년 하반기부터 시작한 나의 '수제 요거트' 루틴은 이제 아들의 루틴이 되었다. 하루 1리터의 우유가 순식간에 사라지지만, 맛있게 비워내는 모습을 보며 매일 아침 다시 요거트를 만드는 수고가 즐겁기만 하다. 입은 또 고급이라, 와일드 블루베리와 와일드 라즈베리가 맛있다면서 너무 행복해해서 일반 베리의 2배 가격인 둘을 다시 사두었다. 다음엔 싼 걸로 사야지. 나에겐 요거트가 저녁식사인데, 가끔 너무 먹어대서 내 몫이 없을까봐 걱정이다. "야! 엄마 저녁은 남겨놔야해!!" 매일 주입한다.


식사를 마치면 아들은 격투기 도장으로 향한다. 영하 10도의 혹한에도 녀석은 내가 등록해 준 오토바이를 타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길을 나선다. "나는 운동을 해야 오후 내내 의자에 앉아 있을 수가 있어."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녀석의 얼굴엔 세상 부러울 것 없는 행복이 서려 있다. '노예 계약'의 대가로 얻어낸 운동이 녀석의 하루를 버티는 단단한 기둥이 된 셈이다. 혼자 나가살 때는 아마추어 선수로 경기까지 뛰고, 무슨 일이 있어도(술자리에 있다가도) 체육관에 가서 3시간씩 운동을 했다고 한다. 이제 시간이 빠듯하니 1시간만 가능한데, 강도가 높고 제대로 할 수 있는 체육관을 고르느라 한동안 애쓴 눈치다.


오후에는 각자의 방에서 각자의 시간을 보낸다. 아들은 방에서 컴퓨터로 그림 연습을 하고, 나는 12시 30분이 되면 점심을 준비한다. 내 루틴은 점심식사를 제대로 만든 한식으로 먹는 것이어서 생선이나 고기를 굽고 찌개나 국까지 끓이고 몇가지 반찬도 한다. 아들은 들어온 주에는 같이 밥을 먹더니, 너무 과하다면서 하루 2끼로 줄였다. 대신 점심에 내가 한 반찬들을 점심 겸 저녁에 먹기로 했다.


3시 30분, 아들의 '점심 겸 저녁' 시간이 되면 집안은 생선이나 고기 굽는 냄새로 가득 찬다. 근육량을 위해 고기를 꼭 먹어야 한다는 녀석을 위해 냄새에 민감한 내가 생선·고기 전용 오븐까지 새로 들였다. 수입산 고기도 괜찮다는 아들에게 차마 그럴 수 없어 좋은 고기를 준비하고 있다. 휴직 중이라 월급이 적어 가세가 기울고 있다. ㅎ 생선고기 전용오븐과 작은 열선 에어프라이어 중 고민했는데, 빵을 먹을 일이 없을 거 같아 전용오븐으로 정했다. 첫 생선구이에는 실패했고, 이후로 한단계씩 실험 중이다. 지금까지는 만족이다. 워낙 냄새에 민감한 나를 위한 탁월한 선택이었다. 밥먹고 설거지까지 하고나면 학원갈 준비를 한다.


4시 30분, 교대역에 있는 학원 갈 시간이 되면 전철역까지 아들을 태워다 주는 새로운 루틴이 생겼다. 날이 너무 추워 몇 번 도와준 것이 어느새 당연한 일과가 되었지만, 복직 전까지 누릴 수 있는 짧은 데이트라 생각하니 나쁘지 않다. 밤 11시가 되어야 돌아오는 녀석의 고단한 일상을 응원하는 마음이 핸들을 잡은 손끝에 담긴다. 11시는 내가 취침을 위해 침대로 가는 시간이다. 며칠 아들을 기다렸는데, 루틴이 망가지는 거 같아서 양해를 구했다. "엄마가 11시에는 자야 해서. 너 못기다릴 거 같아. 미안. 그리고 11시 넘어서 오면 조용히 들어와서, 엄마한테 인사 안해도 되니까 씻고 일찍 자라." 했다. 엄마 건강이 최우선이니까 그런거 미안해하지 말라고 하는 아들의 대답.


이녀석, 나를 닮았구만.


이녀석, 의외로 나를 닮아 있었다. 일상의 루틴을 중시하는 것, 시간을 허투루 보내는 걸 아까워 하는 것, 놀 때와 안놀 때를 구분하는 것, 식사를 건강하게 잘 챙기는 것, 인생에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알고 노력하는 것. 운동을 거르면 죄책감을 느낀다는 점도 닮았다. 3달만에 필라테스에 복귀했는데, 체력이 이전만 못한 거 같아서 영 의욕이 안생겨서 하루 빼먹었더니, "운동은 귀찮아서 빼먹으면 버릇된다. 무조건 아무 생각 없이 가야 하는 게 운동"이라는 충고를 들었다.

뜻밖에도 남녀관계에 있어 유교보이라는 점과 옷에 별 신경을 안쓴다는 점, 추위를 안탄다는 점은 나랑 전혀 다른 점이고. 자기에게 해를 입히지 않으면 넘어가지만, 부당하게 피해를 입으면 참아주지 않는다는 점도 매력 있어 보였다. 그렇게 격투기를 하더니, 누구랑 싸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먼저 싸움을 걸지는 않는다고. 정리하는 습관이 전혀 없다는 것도 나랑 다른 점이다. 이건 좀 닮지 그랬니.


소소한 대화를 나누고, 아들의 유머에 웃음을 터뜨리다 보면 문득 희한한 기분이 든다. 늘 보살펴야 하는 대상이었던 아들이, 이제는 식탁 맞은편에서 함께 삶을 공유하는 든든한 동료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선 넘지 말자'던 다짐은 어느새 '기분 좋게 함께 걷자'는 여유로 변해가고 있다. 돌아온 야생마가 이제는 이곳을 가장 평화로운 안식처로 만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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