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헬스장에는 샤워실과 더불어 냉탕과 온탕 심지어 건식 사우나 시설도 마련되어 있다. 운동 후 한참을 온탕에서 몸을 녹인 뒤 옷을 입고 핸드폰을 켰는데
'부재중 2건'
아내였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첫 휴가를 나왔을 때였다.
군부대에서 아침 7시에 출발을 했지만 동두천과 서울역을 거쳐 무려 6시간 만에 동대구역에 도착하기 직전이었다. 심지어 KTX를 탔는데도 말이다. 막내가 첫 휴가를 나간다고 선임들이 공 들여 닦아 준 반짝거리는 전투화를 보며 요동치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열차가 멈추기 전부터 문 앞에 서서 기다렸다. 드디어 문이 열리고 플랫폼을 밟았는데, 세상에,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둥실 두둥실. 흰구름을 밟으며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집까지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매불망 손주만 기다리고 계실 할머니를 빨리 보고 싶었다. 구름 위를 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날아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날았을지도 모르겠다.
할머니는 대문 앞에 나와 앉아 계셨다. 뛰어 오는 나를 발견하시고는 그 자리에 서서 눈물을 훔치셨다. 씩씩한 이등병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울음을 꾹 참고 달려가 할머니를 꽉 안았다. 뼈만 남아 앙상한 몸이 품에 쏙 들어왔다.
손주가 평소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차려진 밥상 앞에 앉아 할머니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이상하게도 입대하기 전보다 훨씬 더 상해 보였다. 못 뵌 지 겨우 100일이 지났을 뿐인데 5년은 더 늙은 것 같았다. 원래도 많던 주름은 더 깊게 파였고, 웃으실 때 보니 잇몸이 군데군데 거뭇하게 변해 있었다.
할머니 혼자서 대구에서 손주들을 키우셨다. 나 혼자도 아니고 우리 누나랑 또 - 작은아버지가 이혼해서 갈 곳이 없어진 - 사촌누나까지 셋을 돌보셨다. 일흔이 넘으신 할머니는 내 할머니이자 엄마였다.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손주가 군대를 가던 날 아침, 마지막이라고 큰절을 한 번 올리고 앉은 손주에게 울먹이며 말씀하셨다.
"내가 니 제대하기 전까지는 안 죽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조심히 다녀 온나."
만약 군생활 하는 도중에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손주가 정신없이 대구까지 내려오다가 혹시 사고가 날 수도 있으니 그렇다고 하셨다. 결국 마지막까지 손주 걱정이었다.
할머니의 기도와 바람대로 건강하게 전역을 했다.
복학을 하여 두 살 어린 여자 후배들과 함께 전공 수업을 듣는 낭만을 누렸다. 스물셋 청춘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흘렀다. 하지만 청춘의 시간보다 할머니의 노화가 더 빨랐다.
나름 만족할 만한 성적으로 학기를 마무리하고 겨울에는 본격적으로 다이어트에 돌입했다. 군대에서 아침저녁으로 구보를 하며 열심히 뺐던 5킬로가 다시 원상복구 될 것 같았다. 개강 때 훈남 - 이고 싶었으나 흔남이었을 것이 분명한 - 선배로 짜잔 나타나기 위해 헬스장 등록을 했다. 당기고 밀고 뛰고 걷고 매일 두 시간을 투자했더니 야식으로 가득 찼던 턱살과 뱃살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 같아 기분이, 개강하면 여자친구를 사귈 수 있을 것 같아, 좋았다.
그날도 헬스장에 있었다.
당시 스마트폰이 아니라서 운동을 할 때 핸드폰은 들고 가지 않고 옷장에 넣어 두었다. 개운하게 샤워까지 하고 나와서 폴더폰을 열었는데
'부재중 26건'
말도 안 되는 숫자가 찍혀 있었다.
'엄마 3건, 누나 16건, 가장 친한 친구 7건'
떨리는 손으로 친구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맨날 까불까불 하는 놈이 웬일로 차분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더니 빨리 가족에게 전화를 해보라고 하고는 끊는 것이었다. 아니, 그럴 리는 없어.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냐고, 울먹이던 누나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빨리 집으로 가서 짐을 싸고 영천에 있는 영대병원 장례식장으로 오라고 했다.
내가 직접 보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었다.
집까지 어떻게 달려갔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항상 할머니가 나를 기다리며 앉아 계시던 그 자리를 지나, 대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니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누가 봐도 현실이었지만 정작 본인은 부정하고 있던 팩트를 마주했고, 누르고 있던 감정이 폭발했다.
할매, 할매, 부르며 소리쳐 울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덮고 자던 이불을 붙들고 한참을 그렇게 울다가 정신도 못 차리고는 장례식장으로 가기 위해 동대구역으로 뛰어갔다.
15분 남짓한 그 거리는 온통 먹구름으로 가득했다. 시커먼 구름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기 위해 눈물을 꾹 참으려 노력했지만, 모진 고생 이겨냈다고 자부하고 있었던 씩씩한 예비군에게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전화했네, 무슨 일 있어 여보?"
"여보, 점심으로 이삭토스트 먹을래? 올 때 햄 스페셜로 사다 줘."
"응, 알았어. 곧 사서 갈게."
...
두근두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