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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n Yoon Jun 29. 2022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알 수 없는 것 1

지금은 페이스북으로만 연락하고 서로 안 본 지는 십 년 이상이 된 프랑스인 친구가 한 명 있다. 그녀는 파리에 있는 미국대학(American University of Paris)에서 미국 문학을 공부하고 뉴욕으로 건너왔는데, 나는 그녀를 소프트웨어나 컴퓨터 하드웨어 설명서를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하는 회사에서 만났다. 그녀는 영어를 불어로 옮기고, 한국에서 한국 문학을 전공한 나는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을 했다. 소프트웨어 사용법을 안내하는 설명서에 적힌 영어가 얼마나 어렵고 대단했겠느냐마는 우리는 문학작품 대하듯 매사 진지하게 텍스트를 다뤘다. 나는 감히 말하건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작가의 의도에 최대한 가깝게 번역하는듯한 엄정한 태도로 매번 업무에 임했다. 그녀 역시 말해 무엇하랴, 아르튀르 랭보의 시를 영어로 옮기듯 한 문장 한 문장마다 적확한 의미의 단어를 찾느라 어느 때는 몇 시간을 허비하곤 했다. 뭔가 답답하면서도 요란스러운 우리는 단박에 서로의 기질을 알아차리고 친해졌다.     


하지만 우리는 시간제로 일하던 번역일을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얼마 가지 못해 그만두게 되었다. 그녀가 먼저 잘리고 그녀에게 위로주를 사준 며칠 뒤 내가 잘렸다. 눈 깜박하는 사이에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고 대량으로 신제품이 마구 쏟아져 나오는 시대에 그녀나 나나 소위 굼뜨게 일하는 우리의 역량은 환영받지 못했다. 우리는 번역의 질을 따지느라 종종 마감일을 놓치곤 했는데 미국인 매니저는 그런 우리를 불러놓고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자주 쉬기도 했다.

“이건 문학작품이 아니야. 자, 잘 봐, 프린터 매뉴얼이라고! 이걸 누가 읽는다고 그런 식으로 번역하느라 매번 데드라인을 놓치냐고?”

매니저의 어이없어 하는 태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부당하게 해고되었으며 번역시장은 저질 자본주의의 희생양으로 그 수준이 바닥을 치고 있다고 믿었다. 물론 그녀나 나나 그 이후로 번역일을 새로 잡지 못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무선 이어폰을 사든 핸드폰을 사든 매뉴얼은 항상 따라온다. 그런데 나는 어떤 새로운 전자기기를 사더라도 깨알 같은 작은 글씨체로 쓰인 종이 쪼가리를 열심히 들여다보며 기능을 익히지는 않는다. 무조건 나의 감(?)으로 이것저것 버튼을 눌러보고, '안되면 말지' 하는 태도로 부품이 잘못 끼여지면 몇 번을 되풀이하면서 오로지 손과 눈의 감각만으로 신문물을 접하곤 했다. 남편이나 아들은 나의 이런 무식한 방법을 이해할 수 없어 했지만 나는 절대로 설명서를 읽지 않았다. 그깟 기계쯤은 설명서 없이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항상 있었으며, 또 희한하게도 기계 대부분은 설명서를 제대로 보지 않아도 대충 작동시킬 수 있었다. 나조차도 귀찮아서 외면하는 설명서를 프랑스인 친구와 내가 뉴욕에서 그렇게 열을 내며 번역했던 것은 진짜 설명서 글귀의 고품격 가치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이방인으로서 무시당하지 않고자 기를 쓰며 살아 남고자 했던 일종의 고집이었는지, 진정 무엇 때문에 그렇게 미련스럽게 일했는지 그 이유를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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