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문화원 소장사료로 본 평택이야기
삼학사전
평택의 인물 중 그 어렵다는 장원급제를 한 인물이 있다. 팽성읍 함정리에 태어나 1624년(인조2년) 정시문과 장원인 화포 홍익한과 유년기 시절을 이충동에서 보내고 1634년(인조 12년) 별시문과에 장원인 추담 오달제이다.
홍익한과 오달제는 장원 급제를 한 이후 병자호란 당시 사헌부와 홍문관에서 언관으로 활동하며 결사 항전을 주장한 척화파로, 조선이 청나라에 항복한 뒤 척화의 주모자로 윤집과 함께 심양으로 끌려갔다. 이들은 심양에서 모진 고문과 회유에도 척화의 뜻을 굽히지 않음으로써 결국 참형을 당하였고 이들의 곧은 절개에 적들도 감탄하여 ‘삼한삼두’의 비를 세웠다. 이후 세간에서는 홍익한, 오달제, 윤집 이 세 사람의 절개와 충성을 기려 삼학사라고 칭송하였다.
삼학사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 바로 평택문화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삼학사전이다. 삼학사전은 1671년(현종 12년) 송시열이 지은 삼학사의 전기로 그 원문은 『송자대전』제213권에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홍익한·윤집·오달제의 순으로 그들의 약전과 언행, 그리고 잡혀갈 때부터 심양에서 죽기까지 조정의 의논과 대청 관계 등 여러 가지 상황을 기록하였다.
삼학사전에서 홍익한이 청태종과 쟁론하는 장면은 가장 첨예한 대립이 이루어지고 있어 이 책의 백미라고도 할 수 있는 대목이다. 홍익한은 척화파의 우두머리로서 “천하에 모두형제가 될 수 있지만 천하에 두아비가 있는 자식은 없다”며 “내피를 북에 발라 치면 내혼이 하늘로 올라가 고국으로 돌아갈 터이니 이 얼마나 멋진 일이냐”고 당당히 태종(칸)과 직접 쟁론하는 홍익한의 모습은 그의 곧은 절개와 충의를 느낄 수 있다.
이 사료는 조선 후기를 대표적 전기 작품으로 청나라와의 척화론을 주장한 삼학사가 역사적 인물로 기념되었음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이 글은 2015년도 지역신문에 연재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