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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근수근 Jul 03. 2024

이리에 아키라, 20세기의 전쟁과 평화

1. 전쟁의 개념

 전쟁이라는 것은 구체적인 사례로서의 전쟁과 추상개념 혹은 보통명사로서의 전쟁이 있으며, 이들 사이의 관계를 복잡하다. 전자는 시공간적으로 제한되며 대단히 구체성을 띤 특정한 형상인 데 비해, 후자는 무한하게 확대될 수 있고 현실을 떠나서도 존재할 수 있으며 구체적인 싸움보다 더 중요한 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존 다우어의 저서 《암울한 전쟁》은 태평양전쟁 당시의 일본과 미국 양 국민의 의식을 해명한 명저이다. 양국이 가지고 있는 상대방에 대한 추상적이고 이미지화된 적대의식은 전쟁을 더욱 혹독하게 만들었고 종전 이후에도 관계를 정의하는 키워드가 되었다.

 이와 같이 전쟁이라는 개념은 실제 전쟁의 유무에 관계없이, 혹은 다른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19세기 말부터 현재에 이르는 전쟁관 그리고 그 이면의 평화의 이미지를 통해 전쟁이라는 것이 하나의 사회문화적 현상이라는 관점에서 현대사를 해명하고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프랑스의 사상가 레지 드브레 견해를 빌려 전쟁이라는 현상에는 포괄적이며, 표면현상과 부차적 현상을 함께 종합적으로 묘사할 것이며, 전쟁의 이미지와 표리일체를 이루며 존재하는 평화의 개념에 대해서도 언급하기로 한다.


2. 국제사와 국내사

 전쟁 혹은 평화는 국제관계상의 현상임과 동시에 국내적인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에 국내사와 국제사 그리고 양자의 틀 속에서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의 〈상처받은 집〉은 국제관계와 국내사회의 연관성을 시사하는 좋은 예이다. ‘문화’를 강조하는 이들은 국경을 초월하지만 권력이나 경제의 대한 인식이 결여돼 국제적 긴장 완화를 가져오지 못하고 ‘권력’을 강조하는 이들은 문명을 파괴할 수도 있다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국내의 문화와 권력이 분열되어 있는 사회가 전쟁이 일어나면 표면적으로 단결하지만 실제로는 ‘문화’와 ‘권력’사이의 간격을 줄이지 못하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다양한 견해 중의 하나이지만 전쟁을 군사적인 충돌로만 본 다른 견해에 비해 사회의 움직임이나 개인의 심리상태와 관련시켜 생각한 것은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외적현상과 내적조건과의 관계를 통해서 전쟁을 이해하려는 것은 20세기의 전쟁론과 평화관의 특징이라 말할 수 있다.     


3. 권력과 문화

 어떤 의미에서 전쟁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한 국가의 행위(정치, 사회, 사상을 포함)를 문화라고 하고 그 외적인 표현(국가 주권, 군대, 외교)을 권력이라고 보고 이들의 관계를 묻는 것이기도 하다.

 넓은 의미에서 문화란 한 국민의 쌓아 온 유산을 종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과거 유산의 축적에는 정치·경제제도와 조직, 예술과 사상, 관습 등도 포함되며 좁은 의미에서 문화는 후자를 말하고 권력은 전자를 말한다. 그러나 양자를 합쳐서 한 국가의 내적인 행위를 모두 문화라고 하는 것도 가능하다.

 한편 넓은 의미에서 권력이라는 것은 한 나라의 대외적인 힘의 총화이다. 무력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군수산업, 경제제도 나아가 노동, 정치기구 국내의 모든 것, 즉 문화의 힘의 결집이다. 넓은 의미의 문화는 넓은 의미의 권력의 기반이다. 문화와 권력은 표리일체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현실세계에서 문화와 권력의 구조는 다양한 가능성이 있으며 문화와 전쟁의 관계는 복잡하다. 그리고 권력의 대외적인 행사가 국내문화에 심각한 영양을 미치는 것은 당연하다 하더라도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서는 긍정적·부정적 등 많은 견해가 있다. 나아가 한 국가의 사회, 사상 그리고 문화가 호전적일수도 평화로울 수도 있다.

 많은 이들이 내적조건의 조합이 사회의 대외적인 태도를 결정하는가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장 조레스는 내적인 폭력이 대외적인 폭력으로 연결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했으나 반대로 대외적인 온건하며 평화를 가질 수 있을 있지 않을까? 국내질서와 국제질서 사이에는 어떠한 관계가 있을까? 이처럼 전쟁과 평화, 국제관계와 국내 사회, 권력과 문화의 관계에 대하여 어떠한 견해가 제공되어 왔는가를 살펴봄으로써 20세기의 특질을 밝혀냄과 동시에 인류공통의 관심사를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현대사회에도 인류에게 전쟁은 현대를 규정하는 커다란 현상으로 이러한 과거의 유산을 살펴보는 것이 의미 있을 것이다.


4. 동북아시아의 군비확장과 전쟁 

 1장을 통해 말했듯이 과거 전쟁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진단하고 성찰해 보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듯 현재 상황과 대입은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2장에서 살펴보는 것은 소제목처럼 19세기 말 세계대전에 이르는 대내적, 대외적 정세의 현상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모습을 살펴보며 자연스럽게 동북아시아의 정세와 대입이 하게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19세기 말 유럽의 40년간의 안정과 평화는 동북아시아에서 한국전쟁이후 평화와 닮아 있다. 냉전시대의 전쟁 이후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 신냉전의 시기동안 동아시아는 일시적 안정과 평화를 얻고 있다. 그리고 유럽의 근대 5국에 대응하는 정치경제적으로 대국 성장한 동아시아의 중국, 일본, 남한 그리고 미국과 러시아가 치열함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G20회의의 참여하고 있는 국가 중 유럽을 제외하고 동아시아처럼 집중된 곳이 없다는 점이 동북아시아가 정치경제적으로 성장하였다는 것을 방증한다.

 그리고 유럽의 양분된 진영은 단순한 동맹을 넘어 적극적인 군비확장과 전쟁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처럼 현재 동북아시아는 팍스 아메리카와 팍스 시니카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곳이며, 이는 단순히 경제·정치적 부분을 넘어서 적극적인 군비확장을 하고 있다. 방금 언급한 5국에 북한까지 전 세계에서 군사력 순위의 상위권에 포진한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으며, 이는 현재 한국의 사드배치 문제는 이러한 정세와 흐름과 맞물려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과 중국 모두 절대적인 동맹국을 가지고 있으며 정치적으로는 미국과 가깝게 연결되어 있는 한국이 경제적으로 최대무역국인 중국과 그 사이에서의 있는 현실이다. 그리고 중국 역시 이지스함의 추가 배치 등 군비확장을 하고 있으며 일본역시 미국의 동의하에 군비확장을 하고 있는 추세이며 일본헌법 개정까지 하려고 한다. 이는 국제적인 정세뿐 아니라 국내적 정세 또한 유럽의 내셔널리즘에 마찬가지로 뉴라이트, 국가주의 부활, 우경화 등 내재적으로 전쟁을 폭발시킬만한 요소를 안고있다. 그리고 남북대치라는 휴전 상황은 마치 수류탄의 안전핀을 빼고 잡고 있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5. 유럽의 내전에서 세계전쟁으로

 1914년 8월에 발발한 유럽의 대전으로 전쟁은 현실이 되었고 전쟁과 평화에 대한 이미지나 견해가 이전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다양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전쟁발발 당시 유럽 각국에서는 시민의 열광적인 태도로 전쟁이 미화되었다. 이는 주로 내셔널리즘의 발로로서 일체적인 경험과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전쟁관에서는 전쟁원인이나 전략, 전리품 같은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문제보다는 통일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수단이 된다.

 당시 전쟁은 세계질서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킬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단기간에 끝날 것으로 생각했다. 단기간의 전쟁의 결과를 토대로 각국은 정치적·사회적으로 보다 통일된 국가를 만들고자 하였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전쟁의 의미나 목표에 대해 그때까지 보다 훨씬 더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반전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전쟁은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참호전’으로 로맨틱한 이미지와 거리가 멀었고 국가의 생존과의 관계에서 의문이 생기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애국주의보다 더욱 구체적인 목표가 필요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목표 역시 실질적인 전쟁에서의 진전이 없었고 이에 회의감이 생겼으며, 나아가 전쟁을 반대하는 움직임이 출현하게 되었다. 그리고 점차 평화에 대한 동경이 생겼났다. 전쟁초기에는 전쟁을 찬미하던 지식인·예술인·사회주의자들이 1916년경에 이르면 전쟁을 수습하고 평화를 재건해야한다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전쟁의 승리를 통한 평화상태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교섭과 대화를 통해 평화를 회복해야 한다는 의견이 생겨났다. 러시아는 이러한 움직임이 대규모 정치운동으로 확대되어 1917년 2월 혁명으로 이어졌다. 혁명의 이르지는 못했지만 영국·프랑스·독일도 교섭에 의한 평화론이 고조되어갔다. 

 하지만 이러한 교섭에 의한 평화론은 승리가 가능하다고 본 군부나 정치 지도자들의 의해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또한 어떠한 평화를 추구할 것인가에 대한 협의와 교섭을 통해 일치점을 찾는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당시 어떠한 평화가 바람직한가에 대한 구체적인 비전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6. 미국의 역할

 제1차 세계대전의 시점에서 보면 미국에서의 대부분의 논의는 자국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방위문제를 다룬 것이거나 유럽의 사상을 답습한 것이어서 전쟁과 평화에 대한 독특한 견해를 담은 것이 거의 없었다. 고도의 산업사회는 문명적이기 때문에 평화적이며, 문명국사이의 분쟁은 대화로 해결할 수 있다는 낙관론이 유럽에서 수입되어 미국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전쟁과 평화론이 유럽과 다르지 않았고 국제적인 영향력이 적었던 미국은 대전이 장기화되면서 변하게 된다. 문명국 간의 사투는 미국인으로 하여금 충격적이었고 전쟁과 평화에 대한 논의가 과거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전개되었고 미국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견해가 점차 윤곽을 분명하게 드러내 갔다.

 우선 유럽의 전쟁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구세계의 구태의연한 세력균형의 산물이라는 견해가 재인식 되었다. 세력균형적인 구식외교는 전쟁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방식으로 국제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향은 세 가지 견해가 있었다. 첫 번째는 세계평화는 다국 간의 경제교류에 의해서 유지되고 촉진된다는 것이다. 전쟁을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는 것이 일반화 되었으며 이시기 미국의 대외무역은 비약적으로 증가했고 대외적인 대부활동도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에 미국은 전쟁에서 혹은 전후평화에서 국제적인 역할은 경제적인 것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이 점과 관련해서 두 번째 견해, 즉 국제협조에 의한 평화유지라는 관념이 생겨난다. 하지만 상호의존적인 국제환경의 기반이 매우 취약하였다는 것은 전쟁을 통해 보여주었다. 이를 해결하기위해 국제조직을 설립해야한다는 생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구체적인 예가 주요국가간의 정치적인 협조의 장인 ‘평화를 실행하기 위한 연맹’이었다.

 세 번째로 미래의 평화는 각국의 국내개혁에 달려 있다는 국내질서 중심파가 미국 내에서 강해졌다는 것이다. 전쟁이라는 것은 정부나 군부의 지도자들의 의해 좌우되고 이들이 구태의연한 승리를 추구함에 따라 국민의 희생을 강요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각국은 스스로의 개혁 혹은 미국의 영향으로 개혁한다면 타협의 의한 평화가 가능할 것으로 보았다. 이는 미국이 승자의 평화가 아니라 승리 없는 평화를 추구하고 주장함으로 각국의 정치동향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는 의견이 고조되어 갔다는 것이다.

 이는 매우 미국적인 시각으로 특정정치체계는 그에 상응하는 대외정책을 수립한다고 하는 개념으로 미국에서 현저하게 발달하였다. 하지만 러시아는 민주적 혁명이 일어나 정전에서 평화상태로 들어간데 반하여 미국은 유럽의 전쟁에 개입하게 된다.     


7. 볼셰비즘과 평화

 2월 혁명이후 성립되었던 러시아의 정권들은 유럽의 대전을 계속 수행하려는 방침을 관철시키려고 했다. 그리고 미국이 참전하게 된다. 이는 이론적으로는 모순된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윌슨은 ‘전쟁을 없애기 위한 전쟁’,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 ‘십자군으로서의 전쟁’같은 개념을 내세워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했다. 사상적으로는 기존의 것을 유지하되 수단이 중립에서 참전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참전시기, 영국과 프랑스의 민주주의 노선으로 변화라는 측면 등이 모순점으로 남아있다. 이러한 가장 통렬한 비판은 러시아, 특히 볼셰비키당에 의해서 제기되었다.

 러시아의 과격파 볼셰비키당은 전쟁이 제국주의적인 항쟁과 다름없으며 노동자나 농민과 아무런 관계가 없기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전쟁이 자본주의 경제의 피폐를 불러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혁명의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보았다. 이러한 레닌으로 대표되는 볼셰비키당의 전쟁관은 전쟁도 평화도 혁명달성과의 관련 속에서 의미를 가진다. 이는 미국의 전쟁관인 전쟁을 지속하면서 민주적인 개혁을 추진하려는 것과는 정반대의 것이다.

 볼셰비키는 폭동과 데모를 일으켜 프롤레타리아 혁명정권을 수립하자 곧바로 휴전과 화평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독일과 단독으로 불리한 조건으로 정전협정을 맺게 된다. 이는 혁명의 성공이 무엇보다 우선시되는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시아는 또 다른 전쟁의 가능성을 고려해야 했다. 그것은 혁명의 확대에 대응하는 나라와 무력충돌이 불가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타나는 러시아의 전쟁과 평화에 대한 관념은 전쟁의 도덕성이 전혀 무의미 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혁명의 수단으로서의 전쟁을 바라보며 다가올 자본주의와의 전쟁을 염두하고 있었다. 1917년에서 1918년 사이 미국과 러시아는 서로 성격이 다른 전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두 개의 전쟁이 하나의 전쟁이 되었던 것은 1918년 여름의 시베리아 출병이었다. 미국은 대전의 일환으로 러시아는 자본주의와의 간접전쟁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시베리아에서는 전쟁은 소규모였으며 전투다운 전투도 없었다.      


8. 일본에서의 전쟁과 평화

 메이지유신을 거치며 국제사회의 일원이 된 일본은 그들과 동일시하고 유럽의 사상적인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일본만의 독특한 전쟁이나 평화론을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다만 유일하게 일본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던 아시아주의 내지는 인종론적인 국제관은 언급할 필요가 있다.

 메이지시대를 거치면서도 일본은 아시아의 일원이며 서양제국과는 다르다는 인식은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유럽과 동등해지고 싶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이후에도 아시아에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은 전쟁과 평화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그것의 극단적인 예가 인종전쟁론이다. 이는 인종대립으로 인한 전쟁을 대비하여 일본은 아시아의 맹주로 각 국가의 협력과 단결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 예로 이토 히로부미가 평화의 전쟁이라고 불렀던 개념을 살펴보면 미래의 인종전쟁을 대비하여야 한다. 그리고 평화로운 때일수록 일본은 아시아에 자신들의 힘을 부식시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고노에 후미마로의 소론에 따르면 일본인 중심으로 생각했던 평화론은 현상유지를 도모하는 국가와 현상타파를 도모하는 국가와의 전쟁이었다는 인식을 말한다. 여기에는 정의나 인도와는 관계가 없으며 경제적인 제국주의시스템에서 약자인 일본은 아시아의 후진국과 함께 변화를 요구하는 행동을 할 것이라는 경고이다. 이러한 시점은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제3의 시점을 제공하였다.     


9. 파리강화회의의 의미

 강화회의(1919~1920)에서 형성되었던 평화는 윌슨, 레닌, 고노에의 어느 쪽 견해와도 공유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전쟁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던 일시적인 휴전이라 부를 수 있었다. 정전은 윌슨의 14개조를 독일이 조건부로 수용하는 형태였다. 하지만 영국, 프랑스, 일본이 강화회의에 난색으로 인해 독일에게 가혹한 조약이 되어버렸다. 이 강화회의는 하나의 전쟁이 끝날 때 평화에 대해서 어떠한 생각을 갖고 있었는가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준다. 

 이는 크게 세 가지 견해가 있었다. 하나는 독일에 대한 징벌적 평화로 이러한 견해는 영국과 프랑스가 강했고 전후 독일의 약체화와 빈곤을 이끌어 냈다. 그리고 이것이 평화를 유지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는 강화조약을 통해 독일의 고립 뿐 만아니라 새로운 국제질서를 구축해가는 흐름도 있었다. 이 둘은 표리일체로 미국과 영국·프랑스의 서로의 합의를 통해 강화조약과 연맹설치가 이루어졌다. 연맹규약은 국제분쟁의 평화적인 해결이라는 원칙이 있었으며 이를 강조하게 된다.

 둘째로 독일과 터키의 해외영토에 관해서 국제연맹은 새롭게 위임통치제도를 만들었다. 과거의 전쟁처럼 식민지나 영토분배가 아닌 국제기구 관할 하에 미래의 자치나 독립을 대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국제정치에서의 현상유지를 중시하고 있어 평화의 이상인 민주주위가 구축되어야한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셋째로 이 평화는 처음부터 러시아의 사회주의 정권을 제외한 것이었다. 윌슨적인 평화와 대립하는 레닌적인 혁명적인 국가의 가입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또한 위임통치제도에 대해서 러시아는 코민테른을 설치하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세계각지에서 반식민지주의투쟁을 일으키려고 했던 점이 양자간의 차이를 더욱 두드러지게 했다. 러시아는 강화회의와 1919년 평화에 제외되었다. 이는 러시아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투쟁과정으로 보았던 것이다.

 요컨대 제1차 세계대전을 치르는 몇 년간 전쟁과 평화에 대해서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논의가 거듭되었다. 그리고 간신히 도달했던 베르사유의 질서도 그 성격이 모호했다. 이 시기의 전쟁과 평화론은 일반론으로서의 전쟁과 평화에 대한 관념이며, 이것이 전쟁과 평화의 논의를 역사적으로 제약했던 1914~1919년이 갖는 의의였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10. 평화를 원하지만 평화는 왜 이루어지지 않는가?

 대전이후 전쟁은 죄악 평화는 선이란 공식이 나타나고 이에 많은 이들이 호응하기도 하고 그에 따른 의문들이 든다. 이는 군축을 하는 것을 보면 마치 전쟁을 앞둔 이들처럼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전쟁을 겪지 못한이들은 막연하게나마 혹은 직접 겪은이들에게는 전쟁은 기본적으로 선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대전에서의 미국의 ‘평화를 위한 전쟁’이나 러시아의 ‘혁명을 위한 전쟁과 평화’처럼 어쩌면 평화는 뒷순위로 밀릴 가능성이 있는 것이 아닐까?     


11. 깨지기 쉬운 유리잔

 스펜서적인 낙관주의자들은 인간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한다. 인간은 도덕적이고 정의로움을 추구한다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이것이 경제적인면까지 확대될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그런데 정말로 가능할까? 라는 의문이 든다. 

 그리고 1920년대의 평화가 경제적인 측면과 지적교류를 통해 보여주는 다양한 모습들은 전쟁이란 것 앞에 너무나도 깨지기 쉽다. 전쟁이라는 것은 지적교류 따위는 한순간에 무너뜨린다. 이는 평화라는 상황에서만 가능하다.


12. 1945년의 ‘평화’

 제2차 세계대전은 전쟁을 힘의 대결에 의해 해결해야 한다는 고전적인 개념으로의 복귀하게 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평화를 새로운 시각에서 보려고 하는 노력도 이루어졌다. 이러한 양자의 견해 차이는 1945년 이후 전후에 없을 만큼 벌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유일하게 일반화된 개념이 ‘냉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과는 달리 1945년에는 하나의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또 다른 대규모의 전쟁 가능성이 대두되었다. 이는 미·소 두 국가 간의 뿌리 깊은 불신에 더해 동유럽과 중근동 지역에서의 대결에 의한 냉전의 도래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전쟁 중 유럽, 미국에서 세력을 회복한 현실주의적 국제정치론이 전후에도 계속 정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1919년 이후와는 매우 다른 점이다. 

 이러한 견해는 영구적인 평화라는 것은 없기에 국가의 안전을 위해서는 항상 전쟁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고전적 현실주의에 입각한 것이었다. 다만 전쟁 준비라 해도 1945년 이후에는 해무기도 포함되기 때문에 과거에 비해 비용과 파괴력 면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현실주의적인 힘의 논리에서 보면 모든 무기를 사용하는 전략을 준비해 두는 것은 전쟁준비의 필수 조건이며, 핵무기도 당연히 그 안에 들어가야 한다. 즉 현실주의적 국제관계론과 핵무기의 출현이 상호 보완되어1945년 직후의 비극적인 전쟁관을 형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시의 전쟁의식을 설명할 수 있는 제3의 요소는 1930년대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정치체제나 사상이 서로 맞지 않는 국가사이에는 늘 전쟁의 위기가 존재한다고 보는 견해이다. 국내정치와 국제관계를 결부하는 견해는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다른 나라 간에 임전관계를 상정하는 것은 1945년 이후의 일이다. 이러한 단계의 평화는 미국과 소련이 실제 전쟁을 하지 않는 시기, 즉 과도기를 나타내는 것에 불과했다. 전쟁이 '차가운(열전이 되지 않는)'동안의 '차가운 평화'였기 때문이다. 

 다른 평화론으로는 192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거기에 몇 가지 새로운 요소를 추가한 것이다. 첫째, 경제적 국제주의는 근본적으로는 1920년대적인 개념이지만 1945년 이후에는 브레턴우즈 기구와 세계은행의 설립에 의해 더욱 안정돈 국제무역과 경제 발전의 진전을 계획했다. 이것은 극히 미국적인 견해라 할 수 있다. 사실 당시 미국이 탁월한 경제력을 무기로 외환관리의 자유화나 유럽 통합을 촉진하여는 것은 '미국의 평화'를 구축하기 위해서라는 비난이 제기되었다. 

 둘째, 전전부터 있던 문화교류에 의한 평화의 강화도 1945년 이후 재확인된다. 단지 이전에는 국제연맹을 통해서 각국의 지적 엘리트 간 대화가 강조되었지만 지금은 대중간의 교류도 중요하다고 생각되었다. 이 같은 견해가 전후 활발히 진행된 교환교수나 유학생제도의 사상적 배경을 형성했다.

 마지막으로 평화의 사회적 기반이다. 전후국제질서는 단지 전쟁 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가국의 사회개혁을 동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새로운 평화에 대한 노력은 현실에서 맺지 못하고 힘의 균형에 의해 전쟁의 발발을 저지하고자 하는 전통적이며 수동적인 평화관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1945년 이후 각국에서 정치·경제의 혼란이 심해져 신국제주의라고 할 수 있는 전후 평화론만으로는 처리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유럽, 아시아, 중근동, 라틴아메리카 등 각지에 국가들은 혼란과 국내의 대립이 심각해져 개량된 자유주의나 자본주의 만족하지 못한 계층은 더욱더 과격한 사상을 원했다. 각지에서 무정부 상태가 계속되는 상태에서 국제질서의 안정성이 강조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냉전초기의 서방측 이론가라고 할 수 있는 조지캐넌의 전략사상('봉쇄'정책)도 당시의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물론 그도 국제주의나 자유, 인권 등의 가치를 출발점으로 했지만, 소련 지배하의 공산주의의 확대에 대항하기위해 억지력으로서의 군사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1947년 1월 캐넌은 세계가 혼돈 상태에 있기 때문에 미국은 대국으로서 신중하게 대처하고, 힘을 사용하지 않고 내정불간섭의 방침을 관철하는 것이 평화의 길이라는 것이다. 이미 1945년부터 2~3년 사이에 전쟁과 평화의 개념이 분열해버렸다는 것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국과 소련간의 일시적인 평화보다는 '전쟁을 없애기 위한 전쟁'을 한 후에 평화질서를 구축하는 쪽이 낫다는 것이다. 당시의 평화론이 얼마나 혼미했던가를 잘 나타내고 있다.      


13. 현실주의의 융성

 평화는 절대적인 선이 아니라 경우에 따서는 평화보다 더 중요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평화는 희생되어도 어쩔 수 없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1940년대 말부터 1950년대 중엽까지는 현실주의적 전쟁·평화론이 융성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현실주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로버트 오스굿의 『미국의 대외관계에서의 이상과 국익』이 출간된 것은 1955년으로, 미국 외교가 종종 이상을 추구한 나머지 국제정치에서 힘의 관계를 경시했다고 비난한다. 이것은 다시 이야기하면 모든 평화가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현실주의의 전쟁·평화론에 대해 의견을 달리하는 논자도 있었다. 아치볼드 매클리시는 1951년 현실주의라는 것은 결국 전쟁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질타하였다. 이는 당시 일반에서 관용적으로 이해되는 한계 내의 평화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의 평화론은 현실주의자의 억지론이나 그것에 반대하는 측의 추상적인 방공평화주의에 지배되어 구체적인 구상을 그린 것은 드물었다.

 구체성을 띤 유일한 평화론은 국제연합을 개롱ㄴ 평화를 기초로 해야 한다는 국제기구론이었다. 그러나 국제협력이라 해도 여기서 지적하고 있는 것은 '자유로운 사람들'사이의 협조이며, '자유세계'국가들에 의한 평화의 강화이다. 

 1953년경까지는 서방 측에서 평화논의는 근본적ㅇ로 미국과 소련의 무력적, 사상적 대결이라는 테두리 안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비관적인 평화론을 철저하게 추구해 묘사한 것이 조지 오웰의 『1984』이다. 전쟁·평화의 사상사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오웰이 전체주의 국가를 "전쟁 즉 평화, 평화 즉 전쟁"이라고 묘사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오웰의 소설에서 아주 시사적인 것은 평화의 개념의 실질성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권력자에 있어서 평화란 전체주의 체제유지를 위해 늘 임전상태에 놓아두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14. 평화의 모색

 한국전쟁의 휴전(1953)부터 베트남전쟁의 확대(1965)에 이르는 12~13년간은 이전과 비교해 더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평화상이 그려져 있다. 20세기에 태어나서 교육받은 세대들이 알고 있는 평화는 '힘들고 고통스러웠다'고 보며, 이러한 견해는 앞서 언급한 비관론과 결부되어 있다. 

 그러나 또한 동시에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에 걸쳐서 냉전초기의 평화개념을 넘어선 더 적극적인 구상이 시도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냉전체제에 대한 사상적 반발이 점차 표면화되었다는 것, 그리고 또한 국제정세에도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이 경우 과거의 평화 개념이 상기되어 그것을 기초로 새로운 평화구상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한국전쟁이 미·소간의 전면전에 이르지 않고 국지전에 그쳤던 것은 냉전시대의 전쟁 개념에 미묘한 영향을 끼쳤다. 리프먼이 1954년 냉정은 '휴전'상태에 들어갔다고 말한다.

 이 '휴전'을 다른 말로 나타낸 것이 '평화공존'이다. 미국은 여전히 소련과 냉전 상태에 있다는 입장에서 보면 평화공존은 난센스이지만, 인류의 '공존인가 파멸인가'의 선택에 쫒기고 있기 때문에 죽음보다 삶을 선택하는 자는 당연히 평화공존을 택하지 않을 수 없다. 평화가 소극적인 의미밖에 갖지 못해도 적극적인 대소 대결론보다 바람직한 것이라는 의견이 확산되었다.

 더욱이 이런 차원을 초월하여 평화의 개념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려는 노력도 있었다. 특히, 영향력이 있었던 것은 경제적 국제주의와 사회변혁 사상이다. 후진국의 국가형성을 원조 촉진하는 것이 국제평화를 공공히 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때까지의 전쟁·평화론이 미·소 관계를 중심으로 한 것인데 비해 이 새로운 시각은 세계 전체, 특히 제3세계라 불리는 국가들을 대상에 넣었다.

 이것에 미국의 지도적 이념은 '자유주의적 발전'이라고 불리는데, 요컨대 국제경제와의 관련에서 각국의 사회변혁을 육성하고 국가형성을 도와줌으로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려는 것이다. 미국은 그 부와 과거의 유산 때문에 그와 같은 평화건설에 공헌할 수 있다는 낙관론이 점차 강해져 갔다. 그리고 이는 냉전과 열전에 대비하는 것이 외교의 전부는 아니라는 인식이 점차 일반화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다만 그와 같은 평화론은 1920년대에 비해 결정적인 영향을 갖지는 못하였다. 1950년대에 지배적이었던 것은 국가형성에 의한 평화론이 아니라 미·소의 대결을 전제로 한 평화공존론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좋은 예가 국지전에 대비해야한다는 제한전쟁론의 대두이다. 이것과 반대 입장에서 국가형성을 비판한 것은 사회학자 찰스 라이트 밀스 이다. 그는 개발도상국을 원조하는 것 자체는 반대하지 않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들이 '과잉발전국'의 '비인간적인 면'까지 모방하지 않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견해는 미국내부에서 국가형성 평화론을 비판하는 것이었지만 더욱더 큰 타격은 외부로부터 가해진다. 제3세계 자신의 평화·전쟁론 출현이다. 1950년대 아시아·아프리카 국가들의 평화론은 강대국 간 평화공존론이나 경제개발주의와 모순되지는 않았다. 그 좋은 예가 이르반 펴와 5원칙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 년 후 사태는 완전히 바뀌어버린다. 제3세계 평화론이 균열이가고 생김과 동시에 중국은 미·소간의 평화공존 체제에도 반발해 제국주의와의 대결자세를 높여갔다. 


15. 제3세계에 대한 인식확대

 냉전에서의 전쟁, ‘민족해방이라는 이름의 전쟁’은 미·소 양국이 동맹국에 대해 적극적으로 전쟁에 관여하고 참여함으로 미·소 대리전의 양상을 띠게 된다. 하지만 오히려 이로 인해 서방세계가 제3세계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이후에 제3세계가 영향력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책에서도 나오듯 세계를 대신해 글로벌 커뮤니티, 즉 지구전체를 하나의 공동체로 보려는 움직임이다.

 이제는 제3세계가 아닌 다원화된 국가 간의 영향이 커지고 있다. 팍스 아메리카에서 팍스 러소-아메리카로 그리고 나아가 G7 그리고 G20 이미 몇몇 나라가 세계를 지배하는 구조가 아닌 좋든 싫든 서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는 물질문명뿐 아니라 평화·전쟁관에서도 나타나게 된다. 이런 계기가 배트남전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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