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료 없는 ATM부터 계단 지옥까지
두브로브니크에서 세르비아로 이동하는 날.
체크아웃하며 남은 숙박비를 지불해야 했기에 현금을 뽑아야 했다. 우리 모두 여행 전용 카드를 이용했지만 출금 수수료가 꽤나 비쌌다. 잘 찾으면 무료인 곳도 있긴 했지만 극히 드문데다가 정보가 별로 없었다. 인터넷에 공유 되어있지 않은 무료 ATM기를 찾기 위해선 직접 뛰며 발품을 팔아야했다.
전날 잠을 설치고 일찍 일어난 효일은 동생들이 깨기 전 돈을 뽑고 오기로 했다. 백수 둘과 대학생 하나. 가난한 조합이었다. 우리는 한푼이 아쉬운 상황이었다.
'수수료 없이 현금을 뽑으리라.'
효일이는 근처에 있는 ATM을 열 군데 넘게 돌아다니며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 마침내 수수료 없는 ATM을 찾아냈다. 고생은 했지만 시작이 좋았다.
호스트 아버님이 버스터미널까지 데려다 주었다. 엉덩이 수술을 하신 상태라 거동이 불편했음에도 기꺼이 우리를 마중해주기로 하셨다고. 처음 우릴 보자마자 "곤니찌와~" 하셔서 잠시 당황했지만 "우리는 한국인이라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해요."라고 말씀드리니 다시 "안냐쎄오~"라고 인사해주셨다. 굉장히 유쾌하고 다정라신 분이었다. 덕분에 택시비도 아끼고 편안하게 버스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세르비아 가는 버스 있어요?"
"눠(No), 눠."
세르비아에 가기 위해 티켓을 끊으려는데 직원이 너무 불친절했다. 할 수 있는 말이 '눠' 밖에 없는 것 같았다. 유레일 어플에는 두브로브니크에서 세르비아로 바로 이동할 수 있다고 되어 있었다. 직원에게 화면을 보여주며 다시 한 번 세르비아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봤지만, 제대로 찾아보지도 않고 눠, 눠 할 뿐이었다.
직원의 태도가 기분 나빴지만, 여행에서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면 우리만 손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변수가 생겼기 때문에 빠르게 B안을 찾는게 우선이었다. 우리 셋은 머리를 맡대고 두브로브니크에서 세르비아에 가는 법을 서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노선이 꼬이고 시간도 안 맞아 결국 몬테네그로로 방향을 틀었다.
갑자기 몬테네그로라니.
황당했지만 "여행이 그렇지 뭐."하며 이왕 이렇게 된 거 기분 좋게 가보기로 했다.
버스가 국경에 도착했다. 여권 검사 때문에 차가 엄청 밀려있었다. 앞 차가 검사를 받는 동안 잠시 정차하고 있었는데 한 젊은 남자 승객이 화장실 다녀오겠다고 내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무장을 한 경찰이 갑자기 버스에 올라탔다. 그리고 누군가의 여권을 펼치고 말했다.
“자, 이 버스의 승객 중 한 명인 '조르단'이 우리의 허락을 받지 않고 이곳을 돌아다녔습니다. 여러분은 이 조르단이라는 한 사람 때문에 심사가 두세 시간 지연될 예정입니다.”
엄격하고 단호한 말투였다.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의 볼멘 소리가 터져나왔다. 화장실 갔다 조금 돌아다닌던 것 같은데 여권까지 펼쳐 들고 저렇게 망신을 주다니... 몬테네그로가 무서워졌다.
12시에 몬테네그로 도착 예정이었는데 3시간 넘게 밀려 오후 4시가 다 되어 도착했다. 장시간 버스를 탔더니 효둘이는 두통, 효삼이는 멀미가 난다고 했다. 심지어 한 끼도 못 먹었던 터라 허기가 졌다. 우리는 내리자마자 효삼이 찾아놓은 식당을 찾아갔다. 드라이에이징 스테이크가 메인인 레스토랑이었는데 평점이 좋았다. 효일이와 효둘이는 드라이에이징 버거를 먹었고, 효삼이는 먹물리조또를 먹었다. 음식들은 모두 훌륭했다. 오랜만에 외식다운 외식을 한 느낌이었다.
속을 채우고 나니 컨디션이 오르면서 몬테네그로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곳에서의 여행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몬테네그로는 아기자기하고 예쁜 곳이었다. 숙소를 중심지에 잡아서 동네의 다양한 상점을 구경하며 움직였다. 그런데 문제는 숙소가 보이지 않았다. 몇 명의 도움을 받고, 같은 곳을 뺑뺑 돌고 돌아 겨우 찾을 수 있었다. 숙소를 못 찾은 이유가 있었다. 천국의 계단, 아니 지옥의 계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몸체만한 캐리어를 끌고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 올라가는데 정말 죽는 줄 알았다. 여행도 체력이라는 진리를 온몸으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짐을 정리한 후, 전날 잠을 설친 효일은 낮잠을 자겠다고 했다. 효일이 잠들고 효둘, 효삼은 밖을 구경하러 나갔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문을 잠그고 나갔는데... 문제가 있었다. 이 문은 안에서는 열 수 없는 문이라는 것. 효일이가 갇힌 것이다. 잠에서 깬 효일이 문이 잠겨버린 것을 알고 급하게 효둘, 효삼에게 연락을 하려 했지만 설상가상으로 와이파이까지 끊겨 완전히 고립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다행히 효둘, 효삼은 금방 돌아왔다. 우리는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생겼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에는 다같이 산책하며 동네를 구경하기로 했다. 강에는 커다란 여객선이 떠 있었다. 우리는 그 유람선이 출발할 때까지 기다렸다 떠나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우리는 다음엔 크루즈 여행을 해 보자고 다짐했다.
바람을 쐬다 테라스가 있는 식당에서 멋진 저녁을 먹었다. 지금까지 여행하며 느낀 점, 돌아가서의 계획, 걱정과 고민거리를 함께 이야기하며 천천히, 오래 식사를 즐겼다. "매일 이랬으면 좋겠다"는 말이 저절로 나올 만큼 여유롭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중간 정산 결과는 충격과 공포였다. “이 많은 빚을 어떻게 갚지…?” 신용카드로 쓴 돈이 어마어마했다. 잠시 현실의 무게가 느껴지며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치만, 여행이 돈 쓰고 그런 거지 뭐. 우리는 돈 주고도 못살 경험을 한 거라고, 앞으로 돈을 조금 더 아끼기면 된다고 서로를 격려했다.
침대가 하나라 지그재그로 누워 잤다. 좁은 공간에서 각자 최적의 자세를 찾느라 진땀을 뺐지만, 나중에 돌아보면 이런 순간도 그리워질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렇게 하루가 마무리되었다. 수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이 모든 게 여행의 매력이 아닐까?
+우리가 묵은 숙소 풍경
+ 곧이 곧대로 듣는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