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척 공주

예쁜 척 공주의 뜻밖에 왕관

by 지숙수담

17화


어느 날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내 안에서는 오래 묵혀둔 이야기 하나가

조용히 고개를 들곤 한다.

예쁜 척 공주는 그날도 그렇게

자신이 여전히 ‘쓰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리고 있었다.


논문이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던 시기였다.

머리는 이론과 선행연구로 가득한데,

가슴은 점점 말라가는 기분이 들던 때.

그때 우연히 한 공모전 안내문이 눈에 들어왔다.


여성, 인권, 노인, 장애.

삶의 가장 약한 자리를 향한 수필 공모전.

짧은 안내 문장을 읽는 동안

공주의 마음 어딘가가 조용히 울렸다.


“한 번… 써볼까?”


그건 거창한 결심도,

야심 찬 도전도 아니었다.

그저 숨을 고르듯, 한 번쯤 논문이 아닌 ‘마음의 글’을 써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공주는 오랜만에 노트북을 열고

연구자가 아닌,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의 시간을 꺼내 썼다.

누군가의 아내, 며느리, 엄마, 교사로 살아오며

조용히 삼켰던 마음들을 한 줄, 한 줄 적어 내려갔다.

다 쓰고 나니 머리는 피곤했지만, 이상하게도 가슴 한편이 환하게 비워진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일상은 공주를 다시 집어삼켰다.

아이들, 왕국, 수업, 과제…

메일함에 쌓이는 알림 들은 대충 넘겨보는 수준에 그쳤고, 공모전에 글을 냈다는 사실도 어느새 희미해졌다.


몇 주가 지나고 나서야

공주는 인문학연구소에서 온 메일 여러 통을 발견했다.

대충 넘기려다, 한 문장이 눈에 딱 걸렸다.


“창학 120주년 기념 공간주간 수필공모전

3등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순간,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다.

한 번 더 읽고, 스크롤을 다시 올려보고,

이메일 주소를 확인해 보고 나서야 조금씩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상장과 상금 수령을 위한 서류 제출,

출판을 위한 저작권 포기 각서,

작가 소개를 위한 자기소개까지.

현실적인 안내 문장들이 이어졌지만

공주의 머릿속에는

‘당선’이라는 단어만 유난히 밝게 반짝였다.


“정말… 나 맞아?”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신기했고, 낯설었고, 그래서 더 좋았다.


그날 이후로 공주는 다시, 글쓰기가 조금 재미있어졌다

그래서 한 번 더,

또 다른 수필 공모전에 조심스럽게 글을 보냈다.


이번에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설마 또 되겠어?’

스스로 선을 그어두고 그저 할 일을 하듯 글을 보냈다.

그리고 또다시 일상에 휩쓸려

그 사실마저 잊어버리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월요일 아침,

낯선 번호로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OO문인협회입니다.

문학 공모전 대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연말 출간 예정인 문학집에 당선 소감을 수록하고자 하오니, O월 O일까지 소감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공주는 잠결에 문자를 한번 읽고,

‘잘못 온 거겠지’ 하고 지나치려다 다시 화면을 켰다.

두 번, 세 번, 네 번.

몇 번을 읽어도 내용은 같았다.


이번에는 손가락이 먼저 움직였다.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의 또렷한 목소리가

이 소식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정말… 제가 맞나요?”

“네, 선생님. 대상 수상자이십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무언가가 올라왔다.


고등학교 시절 문예부에 들어가

국어 선생님과 함께 써보던 짧은 글들,

장려상, 입상 정도의 조용한 상들.

그때도 분명 기뻤지만,

언제나 ‘나 말고 더 잘 쓰는 사람이 많겠지’ 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서던 공주였다.


그 공주가,

이제는 ‘대상’이라는 이름의 상을 받다니.


“운이 좋았던 걸까?

아니면 정말, 내가 조금은 잘 쓴 걸까.”


여전히 스스로를 과하게 포장할 줄 모르지만,

그래도 이번만큼은 조금쯤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었다.


한 주 내내,

왕국을 오가며 집안일을 하고,

아이들 이야기를 듣고, 수업 준비를 하면서도

마음 한켠에서는 계속 같은 생각이 맴돌았다.


‘아, 나…

그래도 아직 글을 쓰는 사람이구나.’


예쁜 척 공주는 깨달았다.

엄마로, 교사로, 며느리로, 학생으로 사느라

잠시 잊고 지냈을 뿐,

자신의 안에는 언제나 조용히 깨어나는 문장들이 있었다는 것을.


왕관은 언제나 화려한 행사장에서만 씌워지는 게 아니었다.

아이들이 잠든 밤,

컴퓨터 불빛 앞에서 혼자 써 내려간 문장 끝에

조용히 얹히는 작은 왕관도 있는 법이다.


그날 밤,

예쁜 척 공주는 노트북을 덮고 혼잣말처럼 웃었다.


“그래, 예쁜 척만 하고 살아온 건 아니었네.

나, 꽤 괜찮게 쓰는 공주였네.”


그렇게 예쁜 척 공주는

새로운 이름 하나를 얻게 되었다.


글을 쓰는 공주.


그리고 그 이름이,

앞으로의 왕국을

조금 더 반짝이게 해 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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