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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시 Aug 17. 2024

모닝페이지

12. 눈 내리는 고향의 추억

눈 내리는 창가에서 브라질커피를 마십니다.


언제부터 내렸는지 모르겠다. 열두 시에는 오지 않았으니 새벽 서너 시쯤부터 내렸는가 보다., 베란다 난간 위에 1Cm 넘게 쌓여있다. 도로와 들판, 빌라의 지붕 위에도 이미 많이 쌓여 있다. 지금도 내리고 있다. 눈발은 가늘다. 조금 아까 까지는 이슬비처럼 가늘게 내렸는데 이제 점차 굵어 지려는가 보다. 가는 눈발 사이로 굵은 눈송이들이 떨어져 내린다. 제 역할을 끝내고 떨어지는 벚꽃잎처럼


눈이 내리면 내 고향집은 길을 잃고 온전히 혼자가 되었다. 산 밑으로 난 오솔길이 눈 속에 파묻혀 거릿말까지 난 고샅길은 산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 눈이 내리면 마당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마당을 가로질러 잿간까지 가는 길을 내놓고, 다른 한쪽으로 500미터쯤 떨어져 있는 우물까지 가는 길을 열어놓는 것도 힘이 부쳤다. 가끔 언니들과 고향이야기를 하다 보면 언니들의 고향과 나의 고향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성인의 3년이야 차이가 없지만 꼬꼬마 시절의 3년 6년은 많은 차이가 있어 내가 겪은 이야기와 언니들이 겪은 이야기가 서로 달랐다. 신기했다.

어린 시절 겨울엔 빨간 나일론점퍼가 함께 했다. 당시 온 동네 아이들이 지금 패딩을 입듯이 그렇게 단체복처럼 입고 겨울을 났다. 그 점퍼는 나일론으로 되어 있어 겉이 반들반들했고, 안감과 겉감 사이에 얇은 스펀지가 들어 있었지만 따뜻했다. 목에는 모자도 달려 있었다. 그 옷하나만 걸치면 아무리 추워도 천하무적이었다. 모자를 뒤집어쓰고 하얗게 쌓인 눈 위에 두 팔을 벌리고 누우면 그대로 눈사람이 찍혔다. 똑같은 디자인과 똑같은 색의 옷을 입은 친구들과 함께 눈사람도장 찍기 놀이를 했던 어느 한순간은 정지된 채 아직도 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비료포대를 깔고 앉아 도라지 밭에서 눈썰매를 탔던 기억도 조금 남아 있는데 어떤 때는 이것이 정말 나의 기억인지 나의 상상이 만들어낸 기억인지 의심스러울 때도 있다. 겨울에 대한 기억 속엔 다른 것들도 있다. 화장실은 멀었고, 캄캄했고, 무서웠고. 여름에도 밤에는 갈 엄두를 못 냈는데 겨울밤에 화장실은 너무 추웠다. 방문옆에는 항상 오강이 있었다. 어떤 날은 잠을 험히 자다가 오강을 엎었던 날도 있었다고 엄마가 했던 말인지 나의 기억인지 이것도 확실하지 않지만 오줌은 오강에 누면 되었는데 똥이 마려울 때가 문제였다. 한 밤중 똥이 마려우면 마당 끝에 있는 두엄밭에 나가 똥을 쌌다. 희미한 호롱불이었지만 방문을 열어놓은 채 방안에서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불이 꺼지지 않게 단속하고 있는데 나는 두려움과 싸우면서 두엄밭에 앉아서 똥을 싸고 있었던 기억. 이것은 좀 생생하다. 엄마와 나, 언니 둘. 넷은 항상 안방에 모여 살았다. 겨울이면 부엌의 살림들이 윗방에 차려졌다. 찬장도 들어오고, 불을 때고 나면 화로 가득 숯불도 들어왔다. 방이라곤 했지만 안방을 통해 덥혀지게 되어있는 윗방은 그릇들이 얼어버릴 만큼 차갑고 추웠다. 겨울밤에 안방에 있는 자리끼 사발의 물도 꽁꽁 얼어 있었으니. 남자는 없고 아이들은 어린 엄마는 땔감을 어떻게 마련하셨는지 잡목과 잔솔가지로 묶어진 나뭇단이 가을부터 차곡차곡 부엌으로 마당으로 쌓이긴 했었지만 그 겨울 엄마의 고민은 군불을 마음껏 땔 수 없었던 안타까움에도 있었을 것 같다. 눈이 내린다. 추억도 함께 소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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