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홀로 서기를 해야할 때
티백으로 내린 커피를 한 잔 앞에 놓고 생각하는 시간
커페에서 특별히 맛있거나 고소하거나 그런 맛을 찾지 못했다. 정해진 용량보다 물을 많이 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눈에 보이는 것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에 담긴 것도 정해진 용량이 있을 것이다. 직장 생활 41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어떻게 그렇게 긴 시간 동안 묵묵히 해 낼 수 있었을까? 처음엔 아니었지만 이십여 년이 지난 이후 천적이 없었다. 결정하는 위치에 있었고, 내 결정을 컨트롤 해주는 컨설턴트도 있었다. 적어도 나의 결정에 이견은 좀 있을 수 있었으나 그걸로 딴지를 걸거나 공격을 해오는 사람들은 없었다. 나는 일이 성취될 때마다 자긍심을 가질 수 있었고 그 자긍심 하나하나가 나의 지나온 세월에 계단이 되어 올라설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때 뽑았던 신입사원은 3개월 수습기간을 견디지 못했다. 어쩌면 조용한 사무실 분위기가 꼰대문화로 느껴졌을 것도 같다. 수습기간 제게 주어지지 않는 폼나는 업무가 없어서 실망했을 수도 있었겠다. 그래도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너의 평생을 책임질 수 있는 직장에 일원이 될 수 있다고 여러 번 면담했으나 결국은 사직서를 처리했다. 큰 아이가 두 번째 직장을 그만둘 때도 그랬다. 그 직장은 내 사무실 같은 분위기였던 것 같은데 아이의 말로는 옆사람과의 대화도 메신저로 해야 했다고 했으니 그 숨 막히는 분위기는 알 것 같았다. 너무 힘들어서 퇴근길에 길에서 울었다고 말하는 아이에게 3개월만 3년만 참아 보라고 계속 등을 떠밀 수는 없었다.
처음 직장 생활을 시작할 때는 그 봉급이 아니면 매일매일 살 수 있는 식량을 구할 수 없었기에 아파도 힘들어도 억울해도 단 한 번도 그만두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10만 원도 안 되는 그 수입이 엄마와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수입원이었으므로. 막 결혼을 했을 때는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기를 자주 말했으나 뚝심 있게 나아갔다. 불안전한 남편의 수입으로 우리의 노후가 보장되지 않으리라는 계산이 가장 먼저였고, 시어머니와의 수많은 갈등이 직장에 있는 동안은 잠시라도 잊어버릴 수 있어서였다. 나중엔 남편과의 갈등이 있을 때도 직장은 내게 유일한 피난처였다. 종일 일속에 파묻히다 보면 집에서 있었던 일들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다가 퇴근을 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다시 집안의 복잡한 사연들이 돋아나는 그런 세월을 딛고 여기 섰다.
퇴직을 하겠다고 조르는 당신에게. 당신의 퇴직은 당신의 몫이지만 나의 관여가 필요하다고 하면 '퇴직'하라고 의사결정봉을 땅땅 때리고 싶다. 나는 마음이 약하여 결국은 당신이 뜻대로 하도록 허락한다. 그러니 이것은 당신이 나의 허락을 구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강요한 것이다. 처음 시어머니를 집에서 모시겠다고 밤낮없이 조를 때, 당신이 시어머니를 모시고 집을 나가겠다고 조를 때, 방을 하나 얻어 주라고 조를 때, 당신은 그저 머릿속에 생각나는 대로 말을 하고 다시 뒤집었으나 나는 그런 것들을 선호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홀로서기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함께 살겠지만 우리는 남은 날 동안 홀로서야 한다. 그래야 당신도 나도 온전한 삶을 살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