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33
Roncesvalles ~ Larrasoana (26.9km)
06:48 ~ 15:10 (8시간 20분)
거대한 강당과도 같았던 알베르게에서의 하룻밤.
피레네 산맥을 넘느라 몸 이곳 저곳에 알이 배겼다.
새벽부터 서둘러 길을 떠날 채비를 하는 사람들 틈에 일어나 나도 몸을 움직였다.
오늘 여정은 어제 만난 아저씨 두분과 함께 걷기로 했다.
어제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며 발을 맞추어 나갔다.
아저씨 한 분은 대기업 임원을 하고 계셨고,
곧 퇴임이 얼마 안남으셨다고 했다.
또 다른 한 분은 사회적 은행 총재에 역임하시는 분이셨다.
이번 까미노를 끝으로 책을 한 권 쓰고 싶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두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국에 있는 아버지가 떠올랐다.
누구보다 성실히 가족을 위해 살아왔을 시간.
지금 생각하면 한 직장에서 정년까지 오랜 세월을 일한다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다.
분명 일하다보면 고비가 찾아올텐데,
그 순간을 가족을 생각하며 묵묵히 인생이라는 길을 걸으셨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저씨들도 분명 가족을 위해 지낸 세월 속에서
이제 나를 되찾고자 이 길을 걷기로 마음 먹으셨던 게 아닐까.
나는 아저씨들의 지난 세월 이야기를 들으며
조심스레 그런 추측을 해본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보니 English Tea! 가 적힌 푯말을 보았다.
사막의 오아시스와도 같은 이정표였다.
이렇게 까미노 길 곳곳에는 자원봉사자들이 마련한 순례자들을 위한 쉼터가 있다.
감사하게도 이곳의 이용료는 무료이다.
여유가 되는 분들은 차 한잔을 마시고 쉬며 도네이션 박스에 기부를 하기도 한다.
아마 그 기부금은 또 다른 순례자들을 위해 사용될 것이다.
이 곳에서 잠시 차를 마시며 쉬었다 가기로 한다.
오랜만에 걸어서 그런지 속이 부글거려 걷기가 조금은 힘이 들었다.
잠깐의 휴식 덕분에 힘을 내어 다시 나아가본다.
누군가가 주변 돌을 마치 무덤처럼 모아 쌓고,
그 옆에는 그 돌로 화살표를 만들었다.
누군가를 추모하려고 한걸까.
이름 모를 돌이지만 어쩐지 그 안에 이야기가 가득 담겨인 듯 하여 셔텨를 눌렀다.
정오가 되가니 점점 햇살이 뜨거워진다.
이럴 때 우리에게 그늘을 선물해준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참 감사하다.
내가 까미노를 걷던 시기는 6월 말이다.
스페인의 여름은 꽤나 덥다고 알고 있었지만,
햇살이 이렇게 뜨거울줄이야.
저마다 순례하는 방법은 각양각색이다.
나처럼 배낭을 짊어지고 걷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전거에 짐을 실어 순례길을 지나는 사람도 있다.
어떤 방법이 옳다고 할 수 없다.
각자의 방법으로 이 순간 떠오르는 나의 감정에 집중하며 그렇게 걷는 길이다.
까미노 둘쨋날인 오늘,
그냥 걷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하루 누군가를 생각하며 걷기로 마음 먹는다.
한국에 있는 사랑하는 나의 가족과 친구들.
평소에는 늘 곁에 있어 소중함을 몰랐던 사람들.
막상 이렇게 떨어져 있어보니 그들이 내게 준 사랑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그들과 함께한 하루가 나에게 있어 감사한 순간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오후 세시가 되서야 오늘 목표로 했던 마을인 Larrasoana에 도착했다.
오늘 묵을 알베르게로 찾아간다.
도착 후 짐을 내려놓고 샤워를 한 후 입은 옷을 빨아 넌다.
이미 도착한 다른 순례객들이 걸어놓은 옷들의 색감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
스페인의 건조하고 뜨거운 햇살은 순례자들이 내일 이 옷을 입고 다시 길을 떠날 수 있도록 바짝 말려 준다.
그래서 순례를 떠날 때 옷이 많이 필요치 않다.
지금 입고 있는 외에 한 벌.
그거면 된다.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아까 매점에서 만났던 한 영국인 커플을 또 만날 수 있었다.
까미노의 즐거움은 처음 같이 걷기 시작한 동료들과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길에서 자주 마주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한번 스쳐가는 인연인 줄만 알았는데,
이렇게 알베르게에서 또 만나게 된다.
그렇게 계속 인연은 산티아고까지 이어졌다.
나이, 국적, 성별에 관계없이 우리는 모두 같은 순례자다.
그 하나만으로 우리는 그날 밤 한 가족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