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9
Estella ~ Torres del Rio (27.9km)
06:10 ~ 13:30 (7시간 20분)
오늘부터는 정말 나 혼자다.
어제까지 함께 걸었던 아저씨들은 이미 나보다 앞선 마을에서 하루를 묵으셨을거라 아저씨들이 길의 여정을 늦추지 않는 한 다시 만나게 될 일은 희박하다.
산티아고를 걷기 전 3개월 동안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터키, 이집트, 영국까지.
혼자 긴 여행을 해왔건만 다시 혼자라는 생각에 설레면서도 마음 한 켠이 쓸쓸하다.
아직 동이 트기 전,
나보다 앞서 걷는 사람이 이 곳 앞에서 모두 길을 멈췄다.
Irache 마을 인근, 와이너리 벽에 붙은 수도꼭지에서는 와인을 무료로 맛볼 수 있다.
이름하야 와인 분수다.
나바라의 와이너리에서 순례자들을 위해 매일 110리터의 와인을 무료로 제공한다고 한다.
나도 맛보고 싶었지만, 술을 한 모금만 입에 대도 온 몸이 빨개지는 통에 와인을 즐기는 사람들만 보고 지나쳤다.
오늘 걸어야 할 길에는 밀밭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태양의 빛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밀밭의 색채가 한 폭의 그림 같다.
작은 오솔길 같은 길을 가는데 아저씨 한 분이 나에게 인사를 건넨다.
자신은 Italy에서 왔다고 하셨다.
아저씨는 음악을 들으며 이 길을 걷고 있었다.
나 역시도 작은 아이팟에 담긴 노래들을 들으며 심심함을 달래고 있던 차였다.
나에게 어떤 노래를 듣냐고 물어보셔셔,
한국에서 유명한 가수의 노래를 듣고 있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그 때 당시에 까미노를 걸으며 넬의 <기억을 걷는 시간>과 러브홀릭의 <Rainy Day>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여행을 떠나기 전 남자친구와 이별을 경험했기 때문인걸까?
그 당시 남자친구는 내가 4개월 동안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나기 일주일 전, 갑자기 나의 모든 연락을 끊었다.
걱정되는 마음에 남자친구가 살고 있는 곳 앞으로 가서 그를 만나기 위해 무작정 기다렸다.
그렇게 그를 만나 왜 연락을 끊었는지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닌지 내 귀로 들어야만 내가 그를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그를 겨우 만났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네가 그렇게 여행을 오래 떠나서 연락도 잘 안되고 혹시나 잘못되면 자신이 힘들까봐’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당시 남자친구는 군대 제대 후 3학년이었고, 이제 임용고시 공부에 올인해야 한다고 했다.
사실 조금은 황당했다.
그동안 내가 여행을 떠난다는 것을 모르던 사람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럴 수 있는 거니까.
일단 그가 별 일이 없다는 것도 안심이었다.
나를 믿지 못하는 그를 나 또한 놓아주기로 마음 먹었다.
떠나기 전 그에게 주려고 샀던 시계는 끝내 주지 못했다.
It’s rainy day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널 보냈던 날
아픈 내 눈물도 비가 되어 네게 보이지 못한 그날
이탈리안 아저씨는 나를 바라보며 “유럽에 왔으니 유럽 노래도 좀 들어봐!“ 라며 자신의 MP3를 건네주었다.
아저씨의 친절한 배려 덕분에 나는 이 곳에 어울리는 노래를 들으며 즐겁게 길을 걸을 수 있었다.
걷다보니 저 멀리 까미노 카페가 보였다.
순례자들을 위한 간이 카페였다.
잠시 이곳에 앉아 지친 발을 주무르고 커피를 한 잔 마시며 휴식을 취해본다.
이 곳 공간이 너무 예뻐서 타이머로 사진도 한 장 남겼다.
오늘은 그늘이 거의 없는 밀밭이라 힘들었지만,
다행히 구름이 햇볕을 좀 가려주었다.
무리하지 않고 한 걸음씩,
나만의 속도로 나아가면 반드시 산티아고에 도착할 수 있다는 작은 믿음은 이 길을 걸으며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었다.
까미노를 걸은 지 여섯째 날,
나는 지금 두 발로 걸을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