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한 사람
정든 찻잔도 색이 바랜 벽지도
흔적이 힘들어서 바꾸지 말아요
내 마음에도 같은 것들을 남긴 것처럼
- AKMU, 「작별 인사」, 2019
카카오톡 대화가 모두 날아갔다. 휴대폰이 고장 나, 새 폰으로 급히 바꿀 때 미처 백업을 고려하지 못한 것이다. 이럴 리 없어. 악!! 하며 현실을 부정하다가, 방법을 찾아보았다.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상태였다. 약 8년 치의 대화가 사라졌다.
나는 대화방을 쉽게 나가지 않는 편이다. 정산처럼 목적이 분명한 방을 제외하고는, 대화가 없는 방이더라도 차곡차곡 쌓아둔다. 다시 읽어보지는 않는다. 그저 나의 기록이 담겨있는 방을 나가기엔 결단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중한 사람과의 대화방을 지울 때는 단숨에 '나가기'버튼을 누르게 된다. 소중한 사람과의 관계를 끊을 결심을 한 순간은 이미 수없이 많은 고민을 끝낸 다음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소중한 사람'은 '내 인생의 한 사람'이라고 부를법한 사람들이었다. '한 사람'에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붙이는 게 맞지 않아 보이지만, 이상하게도 '내 인생의 한 사람'은 '내 인생의 한 사람이었던 사람'으로 변하곤 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쌓이다 보니 사람들이 된 것이다. 지금은 그 정도로 소중한 사람이 없지만, 소중한 사람과 함께하며 묻은 흔적들은 지금의 나를 만드는 일부가 되었다.
떠난 나, 남겨진 나
시간이 지나고 하나의 관계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누가 떠나는 쪽이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생각했다. 어떤 경우 나는 떠났고, 어떤 경우 남겨졌지만 정말 소중한 관계가 부셔졌을 때는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겨진 쪽인지 알 수 없었다.
- 최은영, 『쇼코의 미소』, 문학동네(2016)
지금 내 곁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내 인생의 한 사람'이라고 하면 지나간 연인들이 떠오른다. 한 때 가족과 친구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했던 인연들. 이별로 끝이 났기에 더 생각이 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소중한 사람과 헤어지면 관련된 모든 기록을 지웠다. 남은 흔적들은 보기에 너무 괴롭고 마음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끝난 관계라면 확실히 끊는 게 나았다. 사진과 대화 기록, 주고받은 선물을 정리한다. 슬프게도 이러한 모든 것은 나를 부정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사진을 잘 찍지 않는 나는, 상대가 찍어주거나, 함께 찍은 사진으로만 지난 시간을 증명하고 있었다. 함께 했던 시간만큼, 갤러리의 기록은 텅 비게 된다.
너의 일기장이 된 기분이야
추억은 한 편의 산문집 되어
길 잃은 맘을 위로하는 노래가 되고
그건 긴 어둠을 서성이던 청춘이
남기고 간 의미일 거야
- 신지훈, 「추억은 한 편의 산문집 되어」, 2022
물론 이별의 끝에 공허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과 깊게 함께할 때는, 서로를 자신으로 물들이기 마련이니.
어느 날, 친구와 대화를 나누다 굉장히 신비로운 표현을 들었다. 내가 해오던 깊은 생각을 한껏 풀어낸 뒤였는데, 조용히 듣고 있던 친구가 이렇게 답했다. "내가 너의 일기장이 된 기분이야." 들었을 당시에는 복잡한 감동에 반응을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지만,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나에게 의미 있는 말로 다가왔다. 서로 믿는 상대와 교감한다는 것은, 서로의 일기장이 되어주는 것이 아닐까? 상대가 마음을 열어 보여준 백지에 나의 글을 한껏 새기고 싶은 욕망. 열정적인 집필이 끝나면, 완성된 일기는 상대방에게 남게 된다. 마찬가지로, 상대방이 남긴 일기는 추억의 산문집이 되어 나에게 새겨진다.
또한 함께한 기억은 나에게 새로운 취향을 만들어준다. 이전의 인연은 카페에서 사람을 구경하길 좋아했다. 카페에 잘 가지 않던 나는 낯선 취미였다. 상대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 사람을 구경하는 재미를 느끼려 노력했다. 시간이 지나 카페 유리창 바깥의 사람을 구경하는 건 내 새로운 놀이가 되었다. 이별 후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자각했다.
많은 것들이 추억으로 남았지만, 그때로 되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 헤어짐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가치도, 함께했던 시기에서 느낄 수 있는 가치만큼 중요하다. 이제는 이별 후에 남은 것들에서 온전한 나를 이끌어 내는 방법들을 배웠다. 이 방법 또한 '내 인생의 한 사람'과 함께 만든 유산이다.
내 미래의 한 사람
서로가 깊게 이어지는 경험이 어떤 식으로든 나를 변화시키다 보니, 함부로 인연을 만들지 않게 된다. 또한 내가 쌓아온 것들에 대해 자신감이 생겨서, 나를 매력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굳이 만날 필요도 없단 오만한 생각도 든다. 한편으로는, 내 기준에 맞는 좋은 사람들은 흔치 않으니,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만날 수 있겠다는 고민도 하게된다.
같은 사람을 만나도 당시의 내가 어떤 상태였느냐에 따라 관계가 많이 달라졌을 거라 생각한다. 지금의 나라면 새롭게 만나게 될 '내 인생의 한 사람'을 사람 그 자체로 긍정하고 존중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든다. '내 인생의 한 사람'과 각자의 물감으로 어떤 그림을 그려나갈 수 있을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