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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닭 Oct 29. 2022

친구해요

당신에게 다가갈 용기

「친구해요 유저가 접속하였습니다.」



  한때 즐겼던 게임이 있다. 젊은 층이 대부분인 게임이라, 심심치 않게 욕이 오고 가곤 했는데, 그중에 '친구해요'라는 아이디를 가진 유저를 만났다. 아이디처럼 정말 친구를 원하는 것인지, 부드럽게 말하는 채팅이 인상적인 유저였다.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 아이디 그 자체가 충격적이었다. '친구해요'라니. 내가 평생 살면서 이런 말을 쓴 적이 있던가? 아니면 들은 적이 있던가? '친구해요'라는 말은, 우정을 위해 적극적으로 다가간다는 의미로 보여서 정말로 인상 깊었다.

  나는 그 유저에게 그러한 아이디를 짓게 된 이유를 물어보았다. 먼저 다가가는 용기를 표현하는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너무 궁금했기 때문이다. 사실 답변은 간결했다. 자신은 "~해요"라는 말에 꽂혀 있었는데, 단순히 친구랑 게임을 하러 왔기에 "친구해요"라고 지었다고 했다. 별것 아닌 이유였지만, 나는 다시 신선한 충격을 느꼈다.

  나는 친구란 표현을 단순하게 사용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유저가 말하는 '친구'에는 가벼운 편안함이 묻어있었다.




친구란 무엇일까?



  서로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을 넘기고 나면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무리를 짓게 되는 시기가 다가오게 된다. 인간관계가 많이 서툴렀던 학창 시절의 나는, 어떤 게 친구인지도 잘 몰랐고, 친구를 어떻게 사귈 수 있는지도 잘 몰랐다. 아니, 사실 남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혼자만의 세상에서 만족하며 살고 있었다.  다행히 나를 좋게 봐주는 또래들이 많았는지, 먼저 다가와서 나에게 말을 건네주곤 했다.

  내가 '친구'라는 관계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게 된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이것저것 배우길 좋아하는 나는, 상담실에서 진행하는 또래상담사 양성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수습기간 중, 내 주변 관계에 대해 되돌아보는 시간이 있었다. 친밀도를 1~5단계로 나눈다면, 내 친구는 어디에 속하는지 답해보는 문항이 있었다. 나는 멈칫했다. 친구? 아, 그저 언젠가부터 곁에 있는 이 사람들이 내 친구였구나. 나는 이 친구를 얼마나 친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아니, 이 친구는 나를 '친구'라고 생각하는 게 맞는 걸까? 평소에 같이 다니던 친구와 함께 또래상담사 활동을 온 것이었지만, 나는 그 친구가 1~5단계 중 어디에 속하는지 쉽게 답할 수 없었다.

  활동 시간이 끝난 후 친구와 함께 교실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지나가던 선생님께서, '너네 자주 붙어 다니네, 친하니?'라고 물어보셨다. 나는 또래상담사 활동 때와 마찬가지로 멈칫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옆에 있던 친구는 일말의 여지도 없이 답했다. "네, 친구예요"

  그 이후로 나는 이 친구와 오래도록 연락하며 지내오고 있다. 지금 쓰는 글도 이 친구 집에 놀러 와서 쓰고 있을 정도로! 더불어 친구관계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친구가 무엇인지는 아직도 정의 내리지 못했지만, 좋은 사람을 내 곁의 친구로 두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들을 해야 하는지, 어떤 모습이 진짜 친구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찐친과 겉친



  친구관계에 대해 의식하면서, 내가 추구하는 친구 관계는 어떤 방식인지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다른 사람들은 친구관계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유튜브 영상을 보다 보면, 진짜 친한 친구(찐친)와, 겉으로만 친한 친구(겉친)를 재밌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영상들이 많이 있다. 나에게 힘든 일이 생겼을 때, 겉친은 과한 리액션과 걱정으로 반응하는 반면에, 찐친은 무관심 혹은 놀리는 것으로 반응한다는 것이다. 댓글에도 폭발적으로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아, 찐친과 겉친에게 사람들이 동의하는 바가 많구나라고 느끼곤 했다. 친해질수록 서로 간의 경계가 허물어지기 때문에, 찐친과 겉친의 차이는 언뜻 보기에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찐친과 겉친의 차이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고 경계한다. 친해질수록 경계심이 허물어지고 투닥투닥 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명심해야 할 건 친구 간에 지켜야 할 예의라고 생각한다. 힘든 일이 생겼을 때 겉친에게 과한 리액션을 보여주고 걱정하는 것은, 그야말로 사람에 대한 예의를 차리고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겉친이든 찐친이든, 걱정하는 마음은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이별로 힘든 친구에게 "어휴 그럴 줄 알았지 ㅋㅋ"로 반응하는 경우가 있다. 그 이별한 친구를 놀리는 것은 분명 그 모임에서 재밌는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지만, 위로받고 싶은 친구의 마음은 알아주지 헤아려주지 못하는 것이다. 언젠가 겉친이 찐친이 되어 격식이 빠진 말투를 사용하더라도,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은 변함없이 표현되어야 한다.  "어휴 그럴 줄 알았지 ㅋㅋ 어디야"처럼.

  나는 이런 경각심을, 대학시절 만난 친구를 통해 배우게 되었다. 신입생 시절, 나를 포함한 대학 친구 3명은 항상 뭉쳐 다녔다. 두 명이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한 명이 통학을 하는 관계로, 우리의 모임은 항상 학교 근처에서 이루어졌다. 두 명이 있는 곳으로 한 명이 오는 것은 합리적으로 보였다. 어차피 등교를 위해서는 나머지 한 명의 친구도 학교로 와야 했으니까. 어느 날, 평소처럼 만날 장소를 정하는 중, 결국 통학하는 친구가 서운함을 토해냈다. "나는 너흴 만나기 위해 매번 1시간 가까운 거리를 오는데, 너희는 내가 있는 곳으로 오겠다는 말은 왜 하지 않느냐. 내가 오는걸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라고. 나는 순간 머리가 띵했다. 친구관계를 이루기 위한 그의 노력을 너무 쉽게 보고 있었구나. 나는 비로소 친구 사이에는 예의가 있어야 한다는 걸 체감했다. 또한 친구관계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나도 항상 편할 순 없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내가 다수에 속했을 때, 소외되는 친구를 잘 살피지 못한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나는 점점 친구에 대한 예의를 정리해나갔고, 친구를 고르는 눈도 까다로워졌다. 예의를 모르는 사람은 곁에 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친구 목록



  나에겐 소수의 친한 친구가, 수많은 흘러가는 사람들보다 훨씬 소중하다. 낯선 타인에게 에너지를 쏟을 바에, 나의 주변에게 힘쓰리라. 나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곧이어 카카오톡의 수많은 친구 목록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것저것 배우러 다니고 활동하며 번호가 저장된 친구 목록만 수백 명이라, 정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 명 한 명 꾹 눌러 숨김 친구로 보냈다. 정리가 끝났다. 남은 인원은 스크롤을 내릴 필요 없이 한눈에 보일 정도로 적었다. 가족을 모두 합쳐 7명이었다. 

  정리가 끝나자 내 마음의 문에는 성이 세워졌다. 성벽 안에 숨겨둔 친구와 가족에게 나는 무엇이든 해줄 수 있었다. 반면에 내게 새롭게 다가오는 사람들은 성벽의 검문소처럼 내 마음속에서 심사받았다. 부적격 사유가 보이면 어차피 멀어질 사람으로 여겨 겉으로만 예의를 지켰으며, 괜찮아 보이는 사람에게는 오랜 기간 엄밀한 심사를 진행했다. 심사기간은 약 2년이었고, 2년 동안 나에게 신뢰를 심어준 사람에게는 성벽 문을 열어주었다. 이것이 내가 복잡한 인간관계를 헤쳐 나가는 방식이 되었다. 살아가며 힘들고 흔들리는 일들이 생겨도, 성벽 안의 소중한 사람들만 있다면 다시 힘을 낼 수 있었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내 마음속 성에는 아주 작은 인원 변동만이 있었고, 소수의 인원만으로 이루어진 성은 황폐화되기 시작했다. 성벽에는 지나간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 손자국을 남겼지만, 성 안의 환경은 너무나 고여버렸다. 사실, 변함없는 성 안의 사람들이 문제가 아니었다. 검문소를 과하게 운영한 내가 문제였다. 이 부분에서, 내가 처음 얘기한 '친구해요'일화가 충격적이었던 이유가 나타난다. 나는 친구관계에 좀 더 가볍고, 열린 마음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었다. 친구관계에는 노력이 필요하단 걸 예전에 깨달았지만, 어느새 고여버린 친구관계에 나도 모르게 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은 나에게 독으로 작용할 것이 분명했다.



사랑은 열린 문



  위기를 느낀 나는 검문소의 절차를 조금씩 간소화했다. 점차 성 안에 드나드는 사람이 많아졌고,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내 마음에는 다양한 사람의 발자국이 묻어나기 시작했으며, 나는 그 다채로운 색채를 받아들이며 색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심적으로 성장한 나는, 새로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마음으로 인사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마치, 영화 겨울왕국에서, 왕국이 개방되는 즐거움에 춤추고 노래하는 안나처럼 말이다. 이제는 두려움을 나에 대한 믿음으로 조금씩 밀어내고, 사람들에게 용기를 가지고 다가가기 시작하고 있다.

  아직은 많이 서툴고 무섭지만, 먼저 다가가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나의 이런 노력이 더욱 건강한 친구관계를 만들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더 나아가, 멋진 친구와 함께하는 나는 멋진 내가 되어 있을 것이다. 

  다가가지 못했던 옛 인연들에게 먼저 말하고 싶다.


  저와, 친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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