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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닭 Oct 23. 2022

어설픔

우당탕탕 사랑스러운

오랜만에 콘서트에 갔다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에 멍하니 천장을 보다가, 갑자기 콘서트가 보고 싶어 예매 사이트를 들어갔다. 다양한 가수와 밴드의 공연들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대부분은 내가 알지 못하거나 관심이 없는 행사들이었다. 커서를 움직여 인디 장르로 들어가 보니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작년 티브이 프로그램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가수였는데, 이 분이 부른 노래 한 곡에 꽂혀 수없이 반복 재생하여 들은 추억이 있다. 이 분이 좀 더 유명해지기 전에 봐야 한다는 생각과, '첫 단독 콘서트'라는 멘트에 홀린 듯이 예매를 했다.




어설퍼서 사랑스러운


  콘서트는 한 마디로 좋았다. 잔잔한 음색이 이어지다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짜릿함도 좋았고, 차가운 목소리와 따뜻한 가사가 가져다주는 미지근함도 좋았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노래보다 콘서트라는 작품 그 자체였다. 내가 이전에 가본 대형 가수의 콘서트와는 다르게, 이번 콘서트는 가수와 관객의 물리적, 심리적 거리가 정말 가까웠다. 어렴풋이나마 육안으로 가수의 표정을 관찰할 수 있었고, 관객의 목소리가 직접적으로 가수에게 닿을 수 있었다. 관객은 '누나 사랑해요'라고 말하고, 가수는 '그래 나도~'라고 화답한다. 가수의 멘트에는 거센 박수소리로 호응하여 쑥스럽게 만들고, 몰래 준비한 깜짝 피켓으로 가수가 감동의 비명을 지르게 한다.

  나는 이 일련의 과정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연륜 있는 가수처럼 무대를 정해진 대본대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가수의 기분대로 노래를 추가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우당탕탕 행사가 진행되는 것이 따뜻한 가족 시트콤을 보는 것 같아 좋았다. 물론 '우당탕탕' 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공연 진행에 난항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마실 물을 깜빡하여 잠깐 기다려 달라는 것, 티 나게 앵콜 공연을 준비하는 것 등에서 순수가 묻은 어설픔이 느껴졌고, 나는 그 어설픔에 애정을 가질 수 있었다.


좌충우돌 우당탕탕


  누구에게나 어설픔은 있다. 사람이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사람은 자신이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사회를 만들어 뭉쳤다. 현대 사회에서 사람은 흔히 톱니바퀴로 비유되곤 한다. 사회가 굴러가기 위해 필요한 부속품 같은 존재인 것이다. 인본주의를 무시한 채 사람을 그저 사회의 부속품으로 보는 시각은 관점 자체로도 차가움이 느껴진다. 사람이 모두 다른 것처럼 톱니바퀴의 모습도 제각각인데, 나는 그중에서도 귀여운(?) 톱니바퀴들을 발견한다. 이 톱니바퀴들은 다른 톱니바퀴들에 비해 유독 작아서, 이를 맞물리지 못한 채 혼자서 맹렬하게 돌아간다. 혹은, 돌아가려 애쓰지만 제 몸보다 큰 톱니를 돌리지 못해 낑낑대며 멈춰있다. 그렇다. 열정적으로 노력하지만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병아리 같은 사람들이다. 

  어린 학생, 새내기, 사회 초년생 등. 막 타오르기 시작한 열정을 가진 채로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을 보면 절로 관심이 간다. 내가 겪어온 힘들었던 시절이 생각나 안쓰럽기도 하고, 기특한 모습에 뭐라도 도움을 주고 싶어 진다. 그들이 작은 동물처럼 뽈뽈거리며 열심히 돌아다녀도, 큰 성과를 내지 못할 것은 알지만, 그 순수한 어설픔이 좋아서 정을 주게 된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


  물론 그 순수한 어설픔은 매우 드물다. 그리고 모두가 따뜻한 시선으로 어설픔을 대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어설픔을 당연하게 여기고 뻔뻔할 정도로 당당한 사람도 있고, 어설픔이 불러올 결과를 감당하지 못해 어설픔을 미워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글에서는 사이다 썰이라며 상대를 골탕 먹인 이야기를 적어두고, 어떤 글에서는 사이다 썰의 주인공이 결국 어떤 처벌을 받게 되었는지 말하며 욕을 한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따질 수 없는데도, 몇몇 사람들은 뭉뚱그려 어설픔과 관련된 모두를 적대시한다. 한 사람에게 당한 좋지 않은 기억을 다른 사람에게도 투영하고, 기대조차 하지 않은 채로 쉽게 비난한다. 이러한 비난이 깊숙이 스며든 대지에서는, 어설픔이 자라나기 힘들다. 꾸역꾸역 살아남은 어설픔은 독을 머금고 자라나, 다른 어설픔의 성장에 필요한 햇빛을 가리게 된다.


어설픔도 사랑스럽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설픔 들을 애정 어린 눈빛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갑자기 사회에 내던져진 아이들은 비좁은 톱니바퀴에 자신을 끼워 맞추기 위해, 제 몸을 부수어가며 쓰라린 고통을 겪는다. 그런 와중에 주변 톱니바퀴들이 신입을 무시하며 욕한다면, 새로운 톱니바퀴들이 얼마나 비참하겠는가. '나도 겪어봐서'안다면, '위로'가 좋을지 '비난'이 좋을지는 나무라는 본인이 가장 잘 알 것이다. 

  다른 표현으로, 어설픔이란 씨앗들이 충분히 자라날 시간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씨앗들이 좀 더 무른 땅을 찾아 이곳저곳 방향을 바꿔가며 흙을 헤쳐 나갈 시간, 뿌리를 뻗어가며 물을 찾아갈 시간, 햇빛을 향해 솟아오를 시간 등. 겉보기에는 변화가 잘 느껴지지 않지만, 씨앗은 앞으로의 평생을 결정지을 기틀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굳건한 나무로 자라나고, 향기로운 꽃들로 피어날지 누가 알겠는가.

  앞이 뻔히 보이는 독초까지 기르고자 하는 마음은 없다. 중요한 건 나 스스로가 지친 마음에 찌들어, 될 성 푸른 잎을 밟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그야말로 초인적인 지혜가 필요하지만, 의식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상황을 바꿀 가능성조차 없게 된다. 상황을 탓하기 이전에 내가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부분을 먼저 찾고 싶다.




우리네 어설픔들에게


  내가 어설픔들에게 관심이 있어 정이 가는 건지, 정이 있어 관심이 가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내가 여유가 있을 때는 이 어설픔들에게 가여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어설픔들을 낮추어 생각하진 않는다. 그저 살아온 시간이 다를 뿐 우위를 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단지 각자의 씨앗을 틔울 수 있도록 응원해주고 싶다.


 앞으로도 어설픔을 사랑할 수 있는 나이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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