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9_ 마지막 꿈

페드로 알모도바르

by 홍홍

페드로 알모도바르(2025). 마지막 꿈. 엄지영 번역. 알마.


그것은 현실과 픽션의 차이, 그리고 현실이 더 완전해지고, 더 즐겁고, 더 살기 좋아지려면 어떻게 픽션을 필요로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여기서 ‘그것’이란, 까막눈인 동네 사람들을 위해 편지를 대신 읽어주던 어머니가 즉흥적으로 편지 내용을 꾸며내던 순간이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자전적 소설집 『마지막 꿈』은 그가 영상과 글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야기꾼으로 성장하는 데 어머니가 어떤 영감을 주었는지를 담은 고백 아닌 고백처럼 읽힌다. 이야기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시작된다. 어머니가 없는 세상에 남겨진 생경한 감정은 이미 내가 알고 있는 감정이어서, 첫 장부터 깊이 공감하게 된다. 많은 아이들이 그렇듯 알모도바르 역시 어린 시절부터 이야기가 지닌 묘한 힘, 즉 삶을 더 아름답게 ‘꾸며’주고 빈 곳을 채워 윤기를 더하는 힘에 매료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그 재능을 일찍 자각했음을 숨기지 않는다. 자타공인 이야기꾼의 탄생은 그렇게 어머니로부터 시작되었고, 그의 삶 또한 그러한 이야기처럼 흘러왔다.


이 소설집에는 영화감독으로 성공한 뒤에 발견된 그의 어린 시절 원고도 함께 실려 있다. 빛바랜 원고를 읽어 내려가며 하나씩 되살아난 기억들, 그 에피소드들이 스며든 듯한 「미겔의 삶과 죽음」은 죽음에서 삶이 시작되는 이야기다. 과거에서 출발해 미래로 나아가는 미겔의 모습은, 오래전에 써두고 잊고 있던 글을 다시 발견하며 자신의 젊은 시절, 즉 과거를 재구성해보는 작가 자신의 모습과도 겹쳐진다. 때로는 ‘과거란 죽은 무엇처럼, 이미지의 선명도가 완전히 사라져 희미한 그림자만 남은, 다시 보아도 쓸모없는 사진 같은 것’이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러나 시신 앞에서 죽음을 맞이하며 비로소 살아 있는 인간이 되고, 과거를 미래로 받아들이며 새롭게 삶을 맞이하는 미겔을 통해, 알모도바르는 독자에게도 조금 더 의식적으로 맞이해야 할 미래가 있음을 조용히 일러주는 듯하다.

은희경 작가는 한 북토크에서 소설가는 할 말이 있어야 하고, 불온한 질문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알모도바르의 작품을 읽으며 그 역시 수많은 질문과 함께 평생 씨름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격한 가톨릭 학교에서의 경험(70~80년대 프랑코 정권의 억압과 맞물린 사회 분위기), 성과 욕망, 정체성의 문제, 그리고 어머니와의 관계는 그의 작품 속에서 반복하여 등장하는데, 이는 작가가 평생 천착하고 싶었던 질문이자, 동시에 벗어나고 싶었을지도 모를 주제의식처럼 느껴진다.


소설집 전반에는 스페인어권 특유의 소란함과 원색적인 감정, 여러 이유로 소외된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떠들썩하고 늘 즐거울 것이라는 편견을 내려놓게 되었다. 그 요란함 아래에는 언제나 고요히 흐르는 고독한 인간의 내면이 있기 때문이다. 알모도바르는 사람들이 어디에 살든, 어떤 언어를 쓰든 인간의 외로움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조용히 보여준다. 떠들썩한 연말을 보내며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마지막 꿈’을 읽으며 속이 시끄러웠던 한 해를 정리하며 삶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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