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과장의 하루는 늘 전투처럼 시작됐다.
출근 카드를 찍고 자리에 앉기도 전에 나사원이 문서를 들고 달려왔다.
“과장님, 어제 수정하신 내용 반영해서 다시 만들어왔습니다!”
문서는 솔직히 훌륭했다.
깔끔했고, 빠진 부분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박과장은 펜을 들었다. 어김없이.
“여기 표현은 좀 더 강하게 해야 하고… 이 순서는 바꿔야겠네. 숫자는 다시 확인해보고…”
나사원은 옆에서 숨을 죽이고 보고 있었다.
박과장이 문서를 다시 반쯤 고친 뒤 말했다.
“이건 내가 정리해서 보낼게. 수고했어.”
나사원은 “네…”라고 했지만, 얼굴에 떠오른 씁쓸한 표정은 숨기지 못했다.
잠시 뒤엔 임대리가 일정표를 들고 왔다.
“과장님, 다음 주 일정입니다. 검토 부탁드립니다.”
역시 완성도는 높았다. 경력에서 나오는 안정감도 있었다.
그런데도 박과장은 또 말했다.
“여기 일정은 하루 당기고요, 이건 순서 바꿔야 해요. 아, 이 시간은 좀 더 정확하게 다시 정리해야겠네요. 이건 제가 수정할게요.”
임대리는 미묘하게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박과장은 그 표정을 보지 못했다.
이미 머릿속은 다음으로 할 일들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점심시간이면 고객사에서 연락이 왔다.
“오늘 검토 문서 아직인가요?”
그제야 박과장은 깨달았다.
정작 오늘 가장 중요한 문서,
프로젝트의 방향과 전략을 담은 문서,
그걸 아직 열어보지도 못했다.
왜냐하면 아침부터 ‘작은 수정들’을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도 점심을 거르고 문서를 봤다.
하지만 그의 손은 방향보다 단어를 고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썼다.
하루가 끝날 무렵, 그는 늘 같은 생각을 했다.
‘오늘 하루 뭘 한 거지?’
‘왜 항상 허덕이기만 하지?’
그러던 어느 날, 이부장이 그를 불렀다.
“박과장, 요즘 많이 바쁘지?”
박과장은 씁쓸하게 웃었다.
“네… 일정이 겹치고 일이 많아서 제가 직접 챙기고 있습니다.”
이부장은 잠시 박과장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너무 바쁘면 위험한 거야.”
박과장은 순간 멈칫했다.
“리더가 너무 바쁘면 딴 생각을 못 해.
여기서 말하는 딴 생각이라는 건 잡생각이 아니라…
방향을 고민하는 시간 말이야.”
그 말은 박과장의 가슴에 깊이 박혔다.
이부장은 말을 이었다.
“옆팀 문과장 보이지?”
박과장은 문과장을 떠올렸다.
늘 커피 들고 창밖을 보거나,
종이에 무언가 적었다 지웠다 하거나,
심지어 멍하니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솔직히 박과장은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여유로워 보이지? 일이 없는 건가?’
이부장은 박과장의 마음을 읽은 듯 말했다.
“문과장은 일부러 시간을 비워둬.
그 시간에 팀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앞으로 어떤 위험이 있는지,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고민하거든.”
박과장은 충격을 받았다.
문과장이 잠깐 멍하니 있던 그 시간들은
그저 멍 때리는 시간이 아니라
‘생각하는 시간’이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날 이후, 박과장은 문과장을 더 유심히 보게 되었다.
문과장은 종이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선을 긋고, 지웠다 쓰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갑자기 뭔가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박과장은 용기를 내 문과장에게 다가갔다.
“과장님… 혹시 지금 뭐하고 계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문과장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리더가 너무 바쁘면 팀이 불편해져요.
그래서 저는 일부러 ‘빈 시간’을 만들어요.
그 시간에 과제를 전체적으로 보는 거죠.
미래도 상상해보고요.”
박과장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는 ‘바쁜 리더’가 팀을 힘들게 하고 있다는 걸 처음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 방향을 잃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날 오후, 박과장은 결심했다.
팀원에게 맡길 수 있는 일은 맡기고
본인은 하루 최소 30분의 ‘빈 칸’을 만들기로.
처음엔 그 시간이 무척 어색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달았다.
문서의 단어가 아니라
프로젝트의 흐름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걸.
작은 실수보다
팀의 성장과 작업 방식이 보인다는 걸.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가 보이기 시작한다는 걸.
박과장은 그날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리더가 여유를 잃는 순간, 팀은 방향을 잃는다.’
리더는 여유가 있어야 방향을 볼 수 있다.
바쁘다는 이유로 모든 일을 스스로 떠안으면 팀은 성장하지 못하고, 리더는 전략을 고민할 시간을 잃는다.
작은 일을 내려놓고 ‘생각할 여유’를 확보해라. 그 시간이 조직의 미래를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