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9시.
회의실 공기가 팽팽하다.
새로 합류한 홍과장의 첫 주간 업무 보고 자리다.
스크린에는 우리 회사의 낡은 엑셀 표 대신,
세련된 디자인의 슬라이드가 떠 있다.
화려한 도표, 날카로운 분석.
누가 봐도 ‘일 잘하는 사람’의 문서다.
하지만 박과장은
그 화려함 뒤에 가려진 팀원들의 난처한 표정을 읽는다.
홍과장이 자신감 넘치게 발표를 마친다.
“이상입니다.
기존 양식은 가독성이 떨어져서,
이전 직장 방식을 적용해 재구성했습니다.
훨씬 보기 편하실 겁니다.”
김상무가 안경을 고쳐 쓰며 묻는다.
“음, 보기는 좋아.
그런데 홍과장, 이 데이터들 우리 PMS에는 입력했나?”
홍과장은 당황하지 않는다.
“아뇨.
PMS 입력 방식이 너무 비효율적이라서요.
일단 이 장표로 보고드리고,
데이터는 나중에 따로 넣으려 합니다.
이 방식이 업무 속도엔 훨씬 도움 될 겁니다.”
김상무가 짧게 혀를 찬다.
“보기 좋은 떡인 건 알겠는데,
이러면 타 부서랑 연동이 안 되잖아.
일단 알겠네.”
회의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
임대리가 박과장의 소매를 잡고 하소연한다.
“과장님, 저 진짜 죽겠어요.
홍과장님 파일, 멋있긴 한데
호환이 하나도 안 됩니다.
제가 일일이 숫자 보고 다시 쳐야 해요.
지난주에도 야근했고,
나사원도 변환하느라 하루를 다 썼습니다.”
박과장은 한숨을 삼킨다.
홍과장은 평판 좋은 엘리트다.
의욕도 넘치고 실력도 좋다.
문제는 그 ‘넘치는 의욕’이
팀의 ‘오래된 관성’과 정면으로 충돌한다는 점이다.
그의 눈에 우리 회사의 시스템은
낡고 비효율적인 ‘구악’으로만 보이는 듯하다.
오후 3시, 탕비실.
홍과장이 최고급 원두를 갈며 말한다.
“과장님, 솔직히 이해가 안 갑니다.
제 프로세스를 쓰면 시간이 30%는 단축됩니다.
왜 다들 그 불편한 엑셀과
느려 터진 시스템을 고집하는 거죠?”
박과장은 말을 아낀다.
홍과장의 눈에
자신은 ‘개혁의 선구자’이고,
나머지는 ‘변화를 거부하는 낡은 사람들’일 테니까.
문제는 며칠 뒤 터진다.
고객사 정기 리포트가 반려됐다.
홍과장이 바꾼 양식 탓에 파싱 에러가 났고,
긴급 수정 요청이 들어왔다.
그날 밤,
나사원과 임대리는
홍과장의 ‘세련된’ 데이터를
다시 ‘구닥다리’ 엑셀에 옮겨 적느라 밤을 새웠다.
정작 홍과장은
“고객사 시스템이 낙후됐다”며
불평만 남기고 퇴근했다.
다음 날 아침,
이부장이 박과장과 홍과장을 부른다.
이부장은 화를 내는 대신,
홍과장의 화려한 보고서를 책상에 둔다.
“홍과장, 보고서 잘 만들었어.
그런데 어제 무슨 일 있었는지는 알지?”
“네.
고객사 호환성 문제라고 들었습니다.
그쪽이 업데이트해야 할 사항 같은데요.”
이부장은 옅은 미소를 짓는다.
“자네 보기에 우리 프로세스가 많이 답답하지?
10년 전 양식을 아직도 쓰니 말이야.”
“솔직히 비효율의 극치입니다.
뜯어고쳐야 합니다.”
이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묻는다.
“맞아, 낡았지.
그런데 그 낡은 엑셀 표 B열 15행에
왜 하필 ‘비고’ 란이 그렇게 좁게 붙어있는지 아나?”
“…모르겠습니다.
그냥 옛날부터 쓰던 거 아닌가요?”
“그 칸은
5년 전 재무팀 결산 시스템과
글자 수를 맞추려고 수정된 거야.
아래 체크박스는
3년 전 감사 이슈 때
법무팀 요청으로 추가된 거고.”
이부장의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자네 눈엔 촌스러운 칸막이겠지만,
서식 하나하나에는
지난 10년간 회사가 겪은 사고와 실수,
타 부서와의 약속이 녹아 있는 거야.
그걸 ‘비효율’이라며 걷어내면,
우린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돼.
어제처럼 말이지.”
홍과장의 얼굴이 붉어진다.
“홍과장.
밭을 갈아엎으려면,
먼저 그 땅에 뭐가 심겨 있었는지부터 파악해야 해.
무작정 트랙터부터 들이밀면
멀쩡한 배수로까지 망가뜨리게 돼.”
“그럼…
이 불편한 걸 계속 쓰라는 말씀입니까?”
“순서가 틀렸다는 거야.
새로운 걸 만들고 싶다면,
기존 템플릿을 불평 없이
3개월만 써봐.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완벽하게.
그러면 보일 거야.
이 절차가 왜 필요한지.
그때 가서 바꿔도 늦지 않아.
기존 것을 존중하지 않는 혁신은 오만이야.”
그날 이후 홍과장이 달라진다.
입을 닫고 관찰한다.
팀의 용어, 결재선 흐름을 그대로 따라 한다.
답답해 미칠 것 같은 순간에도
꾹 참는 게 보인다.
한 달 뒤,
홍과장이 박과장에게 초안을 보낸다.
파일을 열어본 박과장은 놀란다.
기존 양식은 완벽히 지키면서,
하이퍼링크로 세부 데이터를 연결했다.
시스템과 충돌하지 않으면서
정보의 질은 높인 절묘한 타협점이다.
“이거 좋은데요?
업로드도 문제없고
내용도 풍부하고.”
홍과장이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인다.
“써보니까 알겠더라고요.
재무팀, 감사팀 요청 사항이
다 녹아있는 거더군요.
그래서 뼈대는 건드리지 않고
살만 좀 붙였습니다.”
임대리도 거든다.
“맞아요.
이번엔 수정할 필요 없어서
너무 편했어요.”
홍과장의 얼굴에
처음으로 거만함이 아닌,
진짜 ‘팀원’의 미소가 번진다.
반년이 지난 지금,
팀의 프로세스는 많이 바뀌었다.
혁명적인 변화는 아니다.
기존의 뼈대 위에
효율성이 접목된,
우리 팀만의 하이브리드 방식이다.
회식 자리,
이부장이 홍과장에게 잔을 건넨다.
“아직도 시스템이
낡아 빠져서 못 해 먹겠나?”
홍과장이 웃으며 받는다.
“낡은 게 아니라,
튼튼한 거더라고요.
제가 그걸 모르고
인테리어만 새로 하려 했습니다.
요즘은 그 기둥에
페인트칠 정도만 새로 하고 있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홍과장은 ‘우리 팀’의 사람이 되었다.
새로운 것은 언제나 매혹적이다.
하지만 오래된 것에는
그 시간만큼의 무게와 이유가 있다.
그것을 먼저 존중할 때,
진짜 변화는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