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는 직원처럼, 아래로는 회사처럼

by 이부장

박과장은 모니터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고객사에서 또 일정 조정을 요청해 온 메일이 막 도착한 참이었다.

처음 계획했던 일정에서 벌써 두 번째 변경이었다.

그때 옆자리에서 임대리가 의자를 밀며 말했다.

“박과장님, 또 일정 바뀐 거죠?”

박과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번 주 배포도 다음 주로 밀릴 것 같아.”

임대리는 피식 웃었다.

“아니, 이건 좀 심한 거 아닙니까.
우리가 뭐 고객사 일정 맞추는 하청입니까?”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나사원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또요? 지난번에도 밤새서 맞췄는데요…”

사무실 공기가 조금 무거워졌다.

나사원은 한참 말을 참고 있다가 결국 털어놓았다.

“솔직히 좀 억울합니다.
회사에서는 고객이 요청하면 무조건 맞추라고 하고…”

임대리가 바로 말을 이었다.

“맞아요. 회사는 그냥 ‘해라’고만 하고요.
현실적으로 가능한지는 아무도 안 보잖아요.”

박과장은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박과장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최근 몇 달 동안 고객 요청이 계속 늘어나고 있었고, 팀원들은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그때 임대리가 말했다.

“박과장님도 솔직히 그렇게 생각하시죠?”

박과장은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결국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좀 그렇긴 해.”

그 말이 떨어지자 두 사람의 표정이 확 풀렸다.

“그렇죠? 저희만 그런 줄 알았습니다.”

“진짜 요즘 회사 방향이 좀 이상한 것 같아요.”

그날 이후였다.

팀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나사원과 임대리는 일이 생길 때마다 회사 이야기를 꺼냈다.

“또 고객 편만 드네요.”

“회사도 우리 상황 좀 봐야 되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그때마다 박과장은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았다.

가끔은 고개를 끄덕였고, 가끔은 같이 한숨을 쉬었다.

처음에는 그게 팀원들을 이해해 주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며칠 뒤였다.

늦은 저녁, 사무실에 사람은 거의 남지 않았다.

박과장은 커피를 들고 자리로 돌아오다가 복도에서 이부장을 마주쳤다.

“아직 안 갔어?”

“아, 네. 조금 정리할 게 있어서요.”

이부장은 잠깐 박과장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잠깐 얘기 좀 할까?”

두 사람은 회의실에 들어갔다.

이부장은 의자에 앉자마자 바로 말을 꺼냈다.

“요즘 팀 분위기 어떤 것 같아?”

박과장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다들 좀 지쳐 있는 것 같습니다.”

이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도 그렇게 보이더라.”

그리고 잠깐 침묵이 흘렀다.

이부장이 조용히 말했다.

“근데 말이야…
내가 우연히 들은 게 하나 있어.”

박과장은 살짝 긴장했다.

“나사원이랑 임대리가 회사 얘기하는 거 말이야.
고객이 너무 갑질한다, 회사는 우리 생각 안 한다… 그런 이야기.”

박과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부장이 계속 말했다.

“그 옆에 박과장도 있었지?”

잠깐 정적이 흘렀다.

“네… 있었습니다.”

이부장은 웃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같이 동조했다면서?”

박과장은 조금 당황했다.

“팀원들이 좀 힘들어해서… 분위기 맞춰준 겁니다.”

이부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마음은 이해해.”

그리고 잠깐 창밖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근데 말이야, 리더가 그걸 같이 하면 안 돼.”

박과장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이부장이 말을 이었다.

“영화 하나 본 적 있어? ‘라이언일병 구하기’.”

박과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래전에 봤습니다.”

“거기 보면 존.H.밀러 대위가 그런 말 하지.”

이부장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불만을 말하는 데는 단계가 있다고.”

박과장은 기억을 더듬었다.

이부장이 천천히 설명했다.

“병사가 상관 욕을 하는 건 군대에서 흔한 일이야.
근데 그걸 상관이 밑에서 같이 하면 어떻게 될까?”

박과장은 답하지 못했다.

“부대는 바로 무너지게 돼.”

이부장은 말을 이어갔다.

“리더는 불만이 있어도 위로 말해야 해.
위로 올려야 조직이 유지되지.”

잠깐 침묵이 흘렀다.

“근데 반대로, 밑에서는 뭐가 필요할까?”

박과장은 조용히 말했다.

“위로… 아닙니까.”

이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리고 덧붙였다.

“리더는 위로는 불만을 말할 수 있어.
하지만 아래에서는 회사의 입장이 돼야 해.”

박과장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팀원들이 불만을 말하면,
‘그래 회사 이상해’ 이렇게 말하면 안 돼.”

이부장은 잠깐 웃었다.

“그 순간부터 팀은 회사를 적으로 보기 시작하거든.”

박과장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리더가 해야 할 일은 다른 거야.”

이부장이 말했다.

“팀원들이 힘들어하면 공감은 해줘야지.”

그리고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

“하지만 마지막 말은 항상 이거여야 해.”

“그래도 우리가 방법을 찾아보자.”

박과장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부장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리더는 위에서는 직원이지만,
아래에서는 회사야.”

회의실을 나와 자리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사무실 불빛이 조금 어둡게 느껴졌다.

다음 날 아침.

또 고객사 요청 메일이 하나 도착했다.

나사원이 말했다.

“또 변경입니다… 진짜 너무하네요.”

임대리도 고개를 저었다.

“회사도 그냥 다 받아주고요.”

두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박과장에게 향했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박과장은 조용히 말했다.

“힘든 거 맞아.”

두 사람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리고 박과장이 이어 말했다.

“근데 우리도 방법을 한번 찾아보자.”

임대리가 물었다.

“어떤 방법이요?”

“고객 요청 중에서 진짜 필요한 것만 정리해서 다시 제안해 보자.”

박과장은 모니터를 돌렸다.

“회사에도 우리가 힘든 건 내가 이야기할게.”

잠깐 침묵이 흘렀다.

나사원이 작게 말했다.

“…그래도 한번 해보죠.”

그날 오후, 팀 분위기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불만은 여전히 있었다.

하지만 방향이 달라졌다.

그리고 그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덧붙이는 말]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대원들은 전쟁 한복판에서 정예 병력 여러 명을 위험에 빠뜨려 병사 한 명을 구하는 임무가 납득되지 않는다고 여긴다. 그 과정에서 레이번이 “여덟 명을 위험에 빠뜨려 한 명을 구하는 계산이 말이 되느냐”는 취지로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다른 대원들도 거기에 동조하면서 분대 전체의 불만이 드러난다. 이어 레이번은 밀러 대위의 개인적 생각도 묻듯 압박한다. 그러자 밀러 대위는 먼저 “나는 너희에게 불평하지 않는다. 지휘계통이 있고, 불만은 위로 올라가는 것이다”라고 원칙을 말한다. 이후 레이번이 “당신이 대위가 아니거나 내가 소령이라면 뭐라고 하겠느냐”고 다시 묻자, 밀러는 비꼬는 방식으로 자신도 그 임무의 부당함을 느끼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이 장면의 핵심은 밀러가 본심이 있더라도 부하들 앞에서는 먼저 원칙과 지휘체계를 지킨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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