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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pplepie Aug 09. 2022

부모님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직장일과 육아를 병행하느라 잔뜩 지친 나와 남편은 여름 휴가만을 기다리며 살았다. 고단했던 시간을 보상받으려는듯 계획을 세웠고 거기에 적지 않은 돈도 썼다. 기대만큼 행복했던 휴가를 보내고 어느덧 마지막 밤이 되었다. 아쉬움이 짙게 묻은 마지막 밤, 마지막 숙소는 공항에서 멀지 않은 도심에 위치한 호텔이었다.


 그 호텔을 고른 표면적인 이유는 다음날 공항 가기 가 쉽다는 것이었지만 비슷한 다른 호텔 중 굳이 그 호텔이어야 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나의 어린시절 추억이 묻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호텔 수영장에서 밤 수영을 하겠다는 아들과 남편을 두고 나 혼자 호텔을 나섰다. 구)그랜드 호텔, 현 메종글래드 호텔로 바뀐 이 곳에서 도로 하나만 건너면 우리 집이 있었다. 바로 앞이었으니 찾기 쉬울거라 자신했으나 쉽지 않았다. 30년동안 높아진 제주의 인기만큼 빈틈없이 건물들이 난잡하게 들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한 블로거의 포스팅 하나를 단서로 삼아 지도앱을 켜고 전혀 기억나지 않는 골목을 헤집고 다니던 순간 눈 앞에 어렴풋이 익숙한 건물이 나타났고 난 지도앱을 껐다. 여기는 분명히 내가 아는 곳이라는걸 확신할 수 있었다.


조금 더 가니 엄마와 장을 보러 자주 갔던 상가가 나타났다.

 여기까지 찾은 후로는 너무 쉬웠다. 나는 아침에 을 나선 사람처럼 척척 익숙하게 걸었다. 오래 묻어둔 30년전 그때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내가 여섯살 때 우리 가족은 아빠의 발령으로 제주에서 1년을 살았다. 아빠, 엄마, 나, 그리고 엄마 뱃속의 동생까지. 우리는 아무 연고도 없던 신제주 연동의 회사 사택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사택은 3층짜리 빌라였고 맞은 편엔 아빠가 근무하는 회사 사옥이 있었다. 우리는 3층에 살았는데 옆집, 아랫집 모두 아빠와 같은 회사 분들이었다. 엄마가 그 분들을 이 과장님, 문 부장님 하는 식으로 불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원의 가족들까지도 소속감이 넘쳤는지 슈퍼에서 샴푸나 치약 같은 것을 살 때면 엄마가 '럭키'말고 '리도'를 고르라고 했던 기억도 난다.


 제주로 이사온지 얼마 안돼, 동생이 태어났다. 동생이 태어난 그 날은 아빠가 승진한 날이기도 했다는 것을 후에 알았다. 지금 나보다 어렸을 아빠는  날부터 기사가 딸린 차를 제공받았다. 우리는 교회 갈때나 놀러 갈때, 기사 아저씨가 운전해 주시는 차를 탔다. 그래서 우쭐했다던지 하는 기억은 없다. 여섯살은 그런게 좋은지 어쩐지 모를 나이니까. 엄마가 1년 이상 육아휴직을 쓸 수 없어 다시 광주로 돌아올때까지 나는 제주에서 그저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젊었던 아빠 기세는 몇년 더 지속되다 꺾이고 만다. 승승장구하던 아빠는 더 인지도나 규모가 작은 회사의 높은 직책으로 스카우트됐다고 한다. 그리고 몇년 후 우리나라에 imf가 닥치게 되었다. 아빠가 다니던 회사는 큰 회사에 합병되었고 그 후로는 뭐, 그 시절 많은 가정이 겪었던 그런 일이 우리 가족에게도 일어났다. 교사인 엄마 덕에 자식들이 눈치챌 정도로 가세가 기울진 않았지만 몇년 만에 가족과 함께 살게 된 아빠가 전처럼 많이 웃지 않는다는 건 어린 나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언젠가 한번은 술에 취한 아빠가 쓸쓸한 표정으로 내게 '빨리 위로 올라가는건 위험한거다. 내가 그걸 몰랐다.'라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나는 아빠의 그런 모습이 두려우면서도 안쓰럽게 느껴졌다. 아빠가 뭔가를 크게 후회한다는 걸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그 시절은 쉽지 않았지만 그 후로 아빠 엄마는 정말 열심히 사셨고 존경할만한 모습을 많이 보여주셨다. 아빠는 몇 번의 시험을 거쳐 새로운 직업을 찾으셨고 친구들이 많이 퇴직한 지금까지도 활발히 현업에서 활동하고 계시다.


이런 스토리가 있었기에 휴가 마지막 날 내가 굳이 옛 집을 보러, 정확힌 사진을 찍으러 길을 나선 이유는 사실 나를 위해서라기보단 부모님을 위한 것이었다. 사실 여섯살의 기억이란게 별로 애틋하진 않다. 유치원 버스가 어디만큼 왔나 목을 길게 빼고 바라보던 길, 엄마와 빵을 사러 간 그랜드호텔 로비에서 나던 향긋한 빵 냄새. 여섯살의 기억이란 사실 이런 것들 뿐이니까. 하지만 그 시절에 대한 우리 부모님의 향수는 분명히 나의 것보다는 더 깊고 진할 것이었다. 평탄하다고만 할수 없는 자갈밭을 묵묵히 걸어와 이제는 노을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부모님이 잊고 사셨을 그 빛나던 시절의 추억을 선물하고 싶었다.

고작 서른 초~중반이었던 그때 그들의 눈빛은 의욕적으로 빛나고 자신감이 넘쳤을까, 너무 빠른 성공이 때론 불안하기도 했을까. 연고 하나 없던 제주에서 반짝반짝 빛났을 그들과 그들이 전부였던 어린 내가 참 그리워졌다.


입구에 수위 아저씨가 계시고 유니폼과 정장을 입은 직원들이 바삐 돌아다니던 아빠의 회사 건물은 여러개의 가게가 무질서하게 점령해버렸고

사택이었던 건물은 다른 건설회사가 매입해서 다른 이름을 붙이고 있었다. 뒤에 새로 생긴 화려한 건물과 대비되어 더욱 초라해 보였다.


 핸드폰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 사진을 찍고 가족 단톡방에 메세지와 사진을 보냈다. 엄마아빠의 답장은 짧았지만 동생이 해준 말론, 내가 사진을 보낸 그 날 두 분은 오래 그 시절에 대한 얘기를 나누셨다고 한다. 얘가 여길 어떻게 기억하지, 놀라기도 하면서. 내 선물이 잘 전달된것 같아 뿌듯했다. 또, 엄마 아빠의 그 시절을 다시 찾아 주는 딸(=나)이 있다는 것도 두 분에겐 축복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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