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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pplepie Jul 01. 2023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을 다시 읽고

산뜻하고 우아한

 최근에 어떤 브런치북을 읽었다. 브런치 대상 수상하신 작가분의 작품인데 가까운 과거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셨다고 한다. 그 상실감과 슬픔, 괜찮아지려는 움직임이 너무 절절하게 와닿아서 단숨에 다 읽을수 밖에 없었던 그 작품에서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상실을 직접 겪고 노르웨이의 숲을 다시 읽으니 다르다고. 구절마다 깊은 공감을 느낀다는 내용이었다. 덩달아 나도 다시 읽고 싶어져서 도서관에 들렀다.

 이 책(구 상실의 시대) 을 처음 읽은 것은 중학교때였다. 나의 당시 삶의 깊이만큼 얼마나 얕은 감상을 했던가, 기억나는 것은 주인공이 두 여자를 만났다는 것, 책이 너무 야했다는 것 뿐이었다. 20년이 훌쩍 넘어 다시 읽은 이 책은 그 동안 달라진 나의 눈과 생각의 깊이를 반증하듯 예전과 사뭇 다르게 다가왔다.

 사실 나는 성인이 되어서도 하루키 소설과 수필 몇권을 읽었으나 그의 작품에 열광하지 못했고 하루키 열풍이 잘 이해 가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인정했던 건 '산뜻하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그의 작품 속에서 (특히 노르웨이의 숲에서) 땅에 발을 단단하게 딛고 사는 인물은 잘 보이지 않는다. 다들 어딘지 뒤틀리고 엉키고 불안하고 공허하다. 그 뒤엉킴과 불안이 와닿지 않는것은 아닌데, 질척거리지 않고 굉장히 산뜻하다. 소설속에 늘 흐르는 재즈나 클래식 곡들 덕인가, 아님 작가가 나와 국적도 세대도 달라서 느낀 이질감이 산뜻함을 만들어낸 것인가 알수 없지만 어쨌든 산뜻하고 우아하다. 그 뽀송뽀송함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인물들이 한둘이 아닌 이 작품을 읽는 것을 전혀 힘들지 않게 해준다. 심지어 '나는 나의 수렁으로 돌아갔다.'는 구절마저 어둡지 않고 우아하게 느껴진다.

 결말에 이르러 누군가는 끝내 자신의 뒤틀림을 극복하지 못했지만 그(녀)가 결국 실패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합당한 이유에서 그 스스로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어느덧 나는 이 소설의 인물들 모두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느꼈다. 상실로 뒤덮인 작품이지만 허무하지도 않았다. 상실의 무게를 가볍게 묘사하거나 생략한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데 성에 대한 묘사가 지나치게 길고 노골적인것은 예나 지금이나 낯설고 꼭 필요한가 하는 의문이 든다. 내가 유교걸이라 그런가ㅋㅋ

 일주일간 이 작품에 푹 빠져 살았다. 덕분에 나의 삶에도 애정을 좀 더 갖고 지겨운 장마에도 불구하고 전보다 뽀송뽀송한 마음으로 살아낸것 같다. 청춘의 불안함을 잘 묘사했다는 평이 많던데 이 작품은 청춘이 아닌, 청춘을 좀 넘긴 (나같은) 사람에게도 권하고 싶어졌다. 쓰다가 보니 분위기, 내가 받은 느낌, 이렇게 너무 모호한 감상만을 쓴 것 같아 글을 쓴 것이 조금 후회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런 감상도 감상이니까. 노르웨이의 숲 인물들이 각자 다 다른 삶을 사는 것처럼 나의 이런 글도 존재의 의미가 있겠지.라고 과한 자의식과 뻔뻔함으로 글을 마친다. 아, 하루키의 초기작을 빌리러 도서관에 또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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