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추가 지났다고 하지만 드라마틱한 '입추매직'은 올해엔 없는가 보다. 그래도 밤 공기가 아주 미세하게나마 선선해진 것을 느낀다. 그리고 내 몸은 이 계절을 감지했는지 6년 전으로 나를 데리고 간다. 우리 할머니가 숨가쁘게 생의 문턱을 넘나들던 그 계절로. 그러다 결국엔 아주 가버리신 그 계절로.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할머니 손에 컸다. 나처럼 교사였던 엄마는, 지금과 다르게 좋은 육아 제도가 없던 시절에 나를 낳았다. 나는 엄마가 일을 이어갈수 있도록 양가 할머니집을 오가며 자랐다 한다. 할머니 집에서 먹는 밥, 할머니와 함께 보는 아침 드라마, 할머니가 묶어주시는 머리, 나는 할머니와 함께하는 것이라면 다 좋았다. 동생을 낳을 즈음엔 육아휴직이라는 제도가 생겨, 엄마와 아빠가 안정적인 가정으로 나를 데려간 후에도 나는 할머니가 보고 싶다며 울기 일쑤여서 엄마의 속을 닳게 했다고 한다.
그 후 내가 남들도 겪는 성장을 거치며, 운동회에 엄마 대신 참석하는 할머니를 부끄러워하게 되면서도, 주말마다 부모님댁을 방문하는 아빠의 효심이 버거워지면서도, 옛날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는 할머니가 좋았다.
중 3때였을거다. 할머니와 같이 살지 않은 지는 오래됐지만 할머니댁 근처의 학원을 다니던 나는 그날 저녁을 할머니댁에서 먹었다. 다 먹고 학원에 가는 나를 배웅해주시던 할머니가 아파트 현관에서 넘어지시고는 이상하게도 혼자 힘으로 일어나지 못하셨다. 너 수업 늦는다며 할아버지 내려오시라고 하고 넌 어서 학원에 가보라고 하시던 할머니. 그 날 이후로 어딘가의 뼈가 크게 다친 할머니는 모래시계의 줄기만큼 가늘게 조금씩 쇠약해지셨다. 그 날이 내겐 얼마나 오래 죄책감으로 남았는지.
시간이 흘러흘러 가늘게 쇠약해지던 할머니가 결국 요앙병원에 들어가셨다. 우리 아빠를 비롯한 아빠의 형제들은 세상에서 효자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들인데도 다른 방법은 없었다. 할머니가 처음으로 입원하신 병실이 기억난다. 편백 소재의 널찍한 2인실, 여기가 병원인가 양로원인가 싶게 의료진들은 별로 보이지 않던 1층. 나중에야 그게 할머니가 그나마 건강하셨기에 가능한 풍경이었음을, 바로 위층에는 의료진들이 바삐 움직이고 생의 빛이 꺼져가는 어른들이 모여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나는 할머니가 1층에 계실 때 햄버거 따위를 사갔고 할머니가 곧 집으로 가실거라는걸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 후 할머니가 2층으로 옮기게 되셨을 땐, 공교롭게도 내가 삶의 아주 바쁜 순간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임신을 했고 하필 조산기가 있어 휴직을 하고 입원을 했다. 매일같이 어두운 병실에서 자궁 조기 수축이 잡히지 않는 처지를 비관하고 있을 때였다. 그 사이 할머니도 나만큼이나 어두운 시간을 보내고 계셨을 테다.
육아는 임신보다 또 다른 차원의 힘듦이었음을 초여름의 내가 고군분투하며 깨달아가고 있을 때, 여름이 무르익으며 더위가 기승을 부리다 밤공기가 선선해질 무렵, 할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아빠의 전화를 받았다. 분명 그때와 같은 병원인데 할머니는 다른 층에 계셨고 내가 보여드리는 아기 동영상을 보시며 적극적으로 반응하지 않으시고 계속 졸려하셨다. 그 방도 2인실이었는데 옆자리에 계시던, 우리 할머니보다 10살은 어리고 그만큼 건강해보이던 다른 할머니는 우리할머니가 앓을 때마다 소리내어 기도를 했다.
"주여, 이 자매가 주님 곁으로 가려고 합니다."라며.
나는 왈칵 화가 났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이게 뭐하는 짓인가, 그리고 우리 할머니는 절에 다니셨다고! 조용히 좀 하시라 하고 싶었지만 어른들이 다 가만히 계셔서 나도 아무 말 못했다. 나중에 알게 된 건 그 곳도 아주 마지막에 가는 병실은 아니라는 거였다.
낮공기마저 선선해진 완연한 가을이 왔고, 엄마의 연락을 한번 더 받고 간 그 날은 나 혼자였다. 분명 계속 같은 병원인데 갈때마다 병실이 바뀌어 있었다. 중환자실이라고 써있던 그 곳은 다인실이었고 집중관리 대상 환자들이 있는 곳이었다. 솔직히 정말 끔찍했다. 앙상한 어르신들이 생의 가느다란 끈을 붙잡고 계시는, 모두에게 생명유지장치가 부착되어 있는 곳이었다. 거기에 콧줄을 한 할머니가 계셨고 나는 한참을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눈물을 닦았다. 다정한 간호사 한 분이 "누구 뵈러 왔어요?"물으실 때까지.
그날은 장소가 주는 두려움때문이었는지 왠지 할머니를 보는 마지막 날인것 같았나보다. 코를 훌쩍이고 어깨를 들썩이면서도 창피한줄 모르고 큰 소리로 얘기했다.
"할머니, 어릴 때 저 머리 예쁘게 묶어주신거 생각나요. 고마웠어요. 어서 일어나셔서 집에 가서 뵈어요."
할머니가 들으셨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집에 와서 며칠 후 거짓말처럼 할머니가 많이 좋아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심장을 비롯한 많은 수치가 정상이 되었다고. 나는 산뜻한 마음으로 시원해진 날씨에 어울리는 가죽 자켓을 꺼냈다. 그리고 조금 뒤에 더 거짓말처럼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 해 여름부터 가을까지, 요양병원에 가며 느낀 밤공기를 생각한다. 갈 때마다 바뀌어 있던 병실도, 함께 입원해 계시던 어르신들도. 할머니가 요양병원에 가신 일은 효자 오형제도 최선을 다했으나 어쩌지 못한 일이었음을 아주 가까운 곳에서 보았다. 평탄한 삶을 산다면, 큰 이변이 없다면 나의 마지막도 저런 곳이겠지 하는 생각도 해본다. 누군가는 요양병원에 필요 이상의 죄책감과 혐오를 가지고 있기도 할 테지만 내게는 그 곳이 단지 계절로 남아 있다. 붓기가 채 빠지지 않은 몸으로 오르던 그 계단을, 하필 이별의 감상을 더해주던 쌀쌀한 가을밤이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