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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디카페인 플랫 화이트

두유로 옵션 변경하고요

by Applepie

아이를 학원에 넣어 놓고 잠시 뜨는 한시간여 동안 나는 고민 없이 별다방으로 향한다. 별다방은 누군가와 수다 떨기에는 별로지만 혼자 무얼 읽거나 글을 쓸 때는 이만한 장소가 없다. 신기하게도 집중이 잘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다. 적당한 테이블의 간격, 조도, 온도, 그리고 음악... 이런 것들이 치밀한 계산에 의해 세팅된 것이리라. 기미 방지를 위해 볕이 잘 들지 않는 곳에 자리를 잡고 스타벅스 앱을 켜면 맨 첫 페이지에 항상 뜨는 메뉴가 있다. 하도 많이 시켜서 최근 주문에서 자리를 내주지 않는 그것, '디카페인 플랫 화이트'다. 옵션은 두유로 변경하고 디카페인이라 300원이 추가되어 6100원, 음료 한 잔 치고 결코 싸다고는 할 수 없는 가격이라 누가 사줄때는 가급적 고르지 않지만 내가 사거나 나 혼자일 땐 거의 이걸 주문한다. 내친김에 너에 대해 글을 쓰기로 맘 먹는다. 디카페인 플랫 화이트, 나의 취향을 말할 때 단연 1번으로 꼽을 수 있는 너.


고등학교 시절, 나는 자주 배탈이 났다. 원래 잔병치레가 많은 몸은 결코 아니었지만 중학생때에도 멀쩡하던 소화기관이 고등학교때에만 말썽이었다. 자주 배가 아픈 것에 비해 학생들이 같이 쓰는 학교 화장실을 편하게 이용하는 성격도 못 되어서 나는 종종 애를 먹었다. 이 증상은 고3 수험생일때 절정에 달했는데, 엄마는 배가 차서 그런 거라며 애꿎은 토마토를 데쳐 주스를 만들었고 아침마다 마시는 찬물 탓을 하기도 했다. 엄마의 진단으로 나는 아침마다 내 몸을 깨워주던 찬물을 끊고 미지근하게 데친 토마토 주스를 먹었으나 배탈은 나아지지 않았고 아빠와 함께 들른 병원에서는 늘 같은 얘기를 들었다. '신경성입니다.'

내가 큰딸이니 수험생 부모는 처음이었을 아빠는 결국 병원 몇 군데를 더 전전한 후에야 딸의 배탈이 신경성이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당장 내 배탈을 고치는 약은 없으리라는 것도. 하지만 정작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 기분은 내가 잘 알고 난 별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있는데 왜 나더러 신경성이라는지, 자기들도 원인을 모르겠으니까 둘러대는 거라고 투덜대는 내게 아빠는 이런 말을 하셨다.


"너는 마음보다 몸이 예민한 사람이야. 그런 사람은 예술을 하면 좋은데..."


지금 난 예술가와는 사뭇 다른 길을 걷고 있으며 그 무렵 나와 아빠가 나눴을 수많은 말들 중 대부분은 잊혀졌지만 저 말씀은 아직도 일년에 여러번 기억에서 소환되곤 한다. 족히 20년은 되었을 아빠의 그때 그 말이 정말 맞았구나 싶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아빠의 말대로 나는 정말이지 몸이 예민한 사람이었다. 그에 반해 마음은 여러 박자 늦곤 해서 종종 무던한 사람의 가면을 쓴 예민보스가 되곤 한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배탈은 대입과 동시에 사라졌다. 그 후론 어지간히 많이 먹거나 뭘 잘못 먹지 않는 이상 내 소화기관은 대체로 평정을 유지하고 있다.


커피 얘기를 하다 말고 내 몸 얘기를 왜 이렇게 오래 했는가 하면 디카페인과 두유 옵션 변경에 대해 변명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카페인에 민감하고 우유를 잘 소화시키지 못하는 나의 예민한 몸을 설명하기 위해서. '몸이 예민한' 나는 그 후로도 몸이 먼저 반응하여 종종 스스로도 이해 못하는 질병을 앓는데 2년 전쯤 직장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을 때 위궤양을 얻었다. 다행히 일찍 발견하고 치료까지 마친 후로 나는 위에 부담을 주는 커피를 끊었는데 나의 이 커스텀 플랫화이트는 예외였다. 이건 내 위에 아무런 데미지를 가하지 않는 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한잔을 다 마셔도 속이 편안하며 분명 커피 맛이 진하게 나지만 디카페인이라 바로 낮잠을 한숨 때릴 수 있을 정도로 내 자율신경을 자극하지 않는다. 게다가 달지 않고 고소하기만 하며 입술과 혀에 닿는 촉감마저 부드러우니 마시는 순간 내 몸의 예민기를 촤악 가라앉혀 주는 느낌이 든달까. 한 잔을 다 비우고 나면 속도 든든하다. 한달에 한 번 통신사 혜택을 이용하여 사이즈 업을 할 때도 있는데 그럴땐 끼니를 대신 할 수 있을 정도로 배가 부르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 이걸로 끼니를 때워 본 적은 없다. 밥은 꼭 챙겨 먹는 편이라...)


음료를 마시며 20년전으로 잠깐 시간 이동을 했던 나는 다시 책에 집중하려 애써 본다. 책 서너페이지를 읽고 마침 온 카톡에 답장도 하면서. 이렇게 상념에 빠졌다가, 무언갈 읽었다가, 스마트폰도 만지작 거리는 사이 어느새 음료는 바닥을 보인다. 거품만 남아 있는 컵과 이곳에 잠시 더 머무른다. 아직 아이의 하교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조금 나태해져도 괜찮겠지. 내가 좋아하는 것과 함께 한 오늘 오전이 꽤 맘에 든다. 정신없을 오후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낙관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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