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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노르망 Nov 16. 2023

열다섯 번째 산책로
- 『나 자신의 노래』


열다섯 번째 산책로  - 『나 자신의 노래』 



 휘트먼의 『나 자신의 노래』의 표지를 마주하고 있노라면, 순전히 아름답다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는다. 한 노인이 손 위에 앉은 나비와 고요히 조응하는, 그림인지 사진인지의 경계에 있는 사실화가 나의 시선을 끈다. 자연과 교감하는 순간이 너무도 평온하고 부드럽게 그려진 표지 그림에는, 마치 책의 표지에서 튀어나올듯한 실제 나뭇잎의 색감과 질감이 나를 눈속임한다. 속은 걸 알고도 기분이 좋아지는 표지다. 산책을 나갔던 중고서점에서 나는 그렇게 이 책과 우연히 만났다.





이곳저곳에서 그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을 찾아보니, 표지 속 노인은 아마도 휘트먼 자신의 모습인 듯하다. 설사 그 모습이 휘트먼 자신이 아닌 다른 노인의 모습이라고 해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을 만큼 평화롭고 자애롭다. 말풍선 모양의 공간 안에 책의 제목이 담겨있다. 책의 제목이 표기된 위치와 제목의 활자, 크기 역시 하나같이 쾌적하다.


굳이 표지에 대해 꽤나 긴 설명을 한 이유는, 이 표지 자체가 책의 전 내용을 훌륭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느껴져서다. 이 책의 표지 디자이너 역시 책에 상당한 애정을 품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표지의 판본은 더 이상 출간되지 않는다. 새로운 판본이 출간되었지만, 새 판본의 표지가 너무도 무미건조하여 나는 놀라고 말았다.


문득 왜 새 판본의 표지에는 자연과 인간의 조우를 느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는지 의아해진다. 어떤 식으로든 우리는 점차 자연과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괜시리 서글퍼진다. 휘트먼과 그의 글을 닮은 이 표지가 다시금 부활한다면 참 좋겠다. 


 『나 자신의 노래』는 그의 대표 시집 『풀잎』에 대한 일종의 주해서라 보아도 옳을 것이다. 또한 그가 시인일 뿐만 아니라 재능 있는 산문가였다는 점을 보여주는 책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남북 전쟁으로 인한 당시 미국인들의 상흔과 작가 자신의 투병에 대한 고백이 담겨있다. 오래전 그 멀고도 먼 시대에, 타국에서 치러진 낯선 전쟁에 대해 나는 거의 아는 바가 없지만, 휘트먼의 문장들을 따라가며 당시의 상황 속으로 빨려든다. 


책을 읽어나가던 중 어린 시절에 보았던 미국 드라마 <남과 북>이 떠올랐다.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에서 돈독한 우정을 쌓게 된 남부 출신의 병사(패트릭 스웨이지가 이 역할을 맡았었다)와 북군 출신의 병사(난 이 사람을 더 좋아했었는데 배우의 이름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가 남북 전쟁에서 서로에게 총을 겨누게 된 비극적 상황을 다룬 시대극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드라마는 내게 패트릭 스웨이지라는 배우를 처음 알게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남북 전쟁 당시 미국의 시대상을 알려 준 매우 인상 깊은 드라마였다. 하지만 그것은 남북 전쟁에 대한 하나의 허구일 뿐, 정작 진정한 현실은 휘트먼의 이 책 속에 있다.


인간이 벌인 전쟁이라는 잔혹함, 이를 용인한 미국의 정치인들과 민주주의에 대한 휘트먼의 의견이 이 책에는 담겨있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관장하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향한 근원적인 통찰이. 인간이기에 가능한 사고와 표현, 길이는 간결하고 문체도 날렵하지만 그 의미만큼은 둔중하게 가슴에 꽂히는 문장들이. 휘트먼은 부상병들이 넘쳐나는 여러 병동들을 돌며 그들을 위로하고, 가족들에게 편지를 써 주거나 먹고 싶은 음식을 구해다 주며 죽음을 목전에 둔 병사들 곁을 지켰다. 


그의 선행들 중 특히 감명 깊었던 것은 죽어가는 병사들의 가족에게 편지를 써 준 일이다. 부상을 당해 몸이 불편하거나 문맹인 이들이 많았기에 이 작업은 병사들에게 심리적으로 깊은 위안이 되어 주었다. 그는 이름 없이 죽어간 병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적어가며 그들이 한 때 역사 속에 존재했던 사람들임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휘트먼이 그들의 사연을 글로 남기는 동안에도 병사들은 끊임없이 죽어간다. 하지만 휘트먼의 글 속에서 그들의 삶은 의미 있는 모습으로 현재의 우리에게 남겨진다. 


참전했던 병사들의 각기 다른 부상들, 각기 다른 고통들과 사연들. 그리고 각기 다른 죽음의 순간. 그 모든 것을 듣고 기록해 둔 휘트먼 덕분에 우리는 그들의 존재를 기억할 수 있다. 남과 북의 각지에서 모여든 어린 소년병들과 젊은 병사들, 가장이자 아들인 나이 든 병사들, 시대를 거슬러 나와 전혀 연고 없는 국적과 성별, 나이를 지닌 이들이, 금세 아는 사람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작가의 역할이란 타인의 아픔을 대변하고, 다시는 그런 아픔이 반복되지 않도록 기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휘트먼은 내게 속삭이듯 말한다. 살아있는 자가 죽어가는 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꼭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 휘트먼은 알려준다. 부상병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누군가 자신의 침대에 앉아있는 것이다”라고. 누구보다도 인간의 근원적인 가치를 추구했던 휘트먼의 글에서 우리는 강한 휴머니티를 느낀다.  



“병원과 막사, 전쟁터에서 3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다. 약 600곳의 병원을 방문했고, 10만 명 가까운 병사들을 만났다. 나를 필요로 하는 병사들과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나누었다. (...) 생명이 위태로운 환자들뿐이어서 마지막은 언제나 비극이었다. (...) 그 3년 동안 나의 인생관은 완전히 바뀌었다. 나는 인생에 새롭게 눈을 떴고, 모든 생명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것이 내 삶에서 가장 존귀하고, 소중한 교훈이었다. 나의 생명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남군의 악명 높은 저격수일지라도 찾아갔다. 반갑게 인사를 건넸고, 가족에게 보낼 편지를 대신 써 줬으며, 성경을 읽어 주었다.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알지 못하는 내 안의 무언가가 나를 조금씩 변화시켰다. 감정은 숨겨져 있던 심연을 드러냈고, 내 영혼이 내게 힘을 주었다. 뉴 잉글랜드, 뉴욕, 뉴저지, 펜실베이니아, 미시간, 위스콘신, 오하이오, 인디애나, 일리노이 등지를 돌아다니며 수천 명의 부상병들에게 편지지와 과일과 음료와 위로를 건넸다. 그들은 모두 내 형제이기에, 같은 하늘을 바라보고 같은 대지를 밟고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가 한 데 섞일 나의 형제이기에, 그가 남군이든 혹은 흑인이든, 아일랜드 이민자든 힘이 닿는 데까지 그들을 위해 눈물과 땀을 흘렸다.” 



휘트먼이 들려주는 전쟁의 참혹함, 자연의 위대함, 인간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위로, 이런 에피소드 하나하나는 그 자체가 숲에 펼쳐진 작은 오솔길들이다. 그 오솔길들을 탐험하고 산책하며 미처 보지 못했던 생명체와의 호흡에 주의를 기울인다. 숲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보이지 않는 전쟁에도 귀를 기울인다. 그리하여 나는 거대한 숲 전체의 모습에 점차 다가선다. 거대한 우주의 섭리를 감히 상상해 본다. 


걸어도 걸어도 다시 걷고 싶은 그런 길들이 있다. 휘트먼이 내게 펼쳐 준 산책로가 바로 그런 길이다. 투박한 듯 직설적인 문체는, 마치 가지런히 다듬어지지 않았으나 자연미 가득한 숲길처럼 우리를 매료시킨다. 오로지 그 인격의 진솔한 목소리만이 귓가에 청량하게 울린다. 


휘트먼이 살고 있던 시대에는 인간이 자연의 한 귀퉁이를 빌려 살았지만, 이제는 자연이 인간 문명의 한 귀퉁이를 빌려 살고 있다. 이것은 어쩌면 우리가 스스로 밀어낸 우리 자신일 것이다. 현대인들은 자연에 흠뻑 젖어 살지 못했기에 자연을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모른다. 급기야 자연이 원하는 바에도 영영 다가설 수 없으리라는 불길한 예감마저 든다. 대자연과의 접촉을 통해 형성되어 온 인간의 근원적인 가치가 우리와 멀어지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인간의 위대함과 선함은 왜 더 이상 진화되지 않는 것인가. 


나는 휘트먼의 생각과 삶의 태도에 공감 이상의 경외심을 갖는다. 그가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를 통해 인간과 자연의 관계로까지 확장시키고자 했던 인본주의 사상, 나아가 ‘인격주의’라 불리는 사상은 전쟁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제기된 것이었다. 한 사람이 어떤 인간인지를 말해주는 것은 무엇보다 그의 인격이다.



“인간을 죽이는 것도 인간이고, 인간을 살려내는 것도 인간이다. 인간의 손은 방아쇠를 당기고, 다시 그 손으로 수술대에 누운 환자의 상처를 도려낸다.”  



그러므로 인간이 생명을 존중하고,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며 연대해 나간다면 평화로운 공동체 유지란 가능하다. 휘트먼은 자연과 인간이 바람직하게 공존하며 서로를 치유하는 삶을 추구한다. 그것은 곧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함과 같다. 그것이 곧 우주의 질서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풀잎과 같은 존재이기에.



한 아이가 물었다, 풀잎이 뭐예요? 손 안 가득 그것을 가져와 내밀면서. 

내가 그 애에게 무어라 답할 수 있을까... 그것이 무엇인지 

그 애가 알지 못하듯 나도 알지 못하는데.


나는 그것이 내 기분의 깃발, 희망찬 초록 뭉치들로 직조된 

깃발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나는 그것이 하느님의 손수건이라고 생각한다. 

향기로운 선물이자 일부러 떨어뜨려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한구석 어디엔가 그 주인의 이름을 간직하고 있어 그것을

본 우리가 누구 것이지? 하고 묻게 되는 그런 것.


아니면 나는 풀잎은 그 아이 자체라고... 식물로 만들어진

아이라고 생각한다. (...)   


                                                                              - 휘트먼의 시집 풀잎』 중에서



『풀잎』의 사상과도 연결되는 『나 자신의 노래』는 이제 더 이상 휘트먼 자신만의 노래가 아니다. 휘트먼의 노래는 자연이 부르는 노래이자, 인간 모두의 노래, 그리고 이 글을 쓰는 나 자신의 노래이기도 하다. 고결한 휘트먼의 인격이 빛을 발하는, 외양과 내용이 한결같이 아름다운 책이다. 


휘트먼과 같은 이가 인류사에 존재했음에 감사한다. 만일 꼭 그래야만 한다면, 무인도에 가져갈 단 한 권의 책이다. 불현듯 나 역시 그와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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