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갖게 된 경위는 여러모로 내겐 특별하다. 그간 『산책하다 산 책』에 수록된 책들과, 미처 여기에 소개하지 못한 수많은 또 다른 책들을 구매할 수 있었던 건 집 근처의 중고 서적 덕분이었음은 이미 책의 앞부분에서 언급했다.
작년 2월, 12년간 살았던 그 동네를 떠나 그동안 종종 작업실로 이용했던 나의 옛 집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작업실에는 이미 많은 책들이 꽂히고 쌓여 있었는데 거기에 10여 년에 걸쳐 더더욱 불어난 책들을 더하자니, 그야말로 이사한 집은 사람이 아니라 책들이 주인인 공간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당분간은 책을 사지 않고, 사두었으나 미처 읽지 못한 책들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기로 다짐했다. 게다가 새로 이사한 집 근처에는 마땅히 방문할 만한 서점도 없었기 때문에 더 이상 책이 늘어날 일은 없지 싶었다. 집 정리를 비롯해 이래저래 분주한 날들이 이어졌고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당연히 새로운 산책로를 마련해야 할 시점이 도래했다. 집 주변을 이곳저곳 돌아보기 시작했다. 과연 그간 내가 모르고 있던 장소들이 불쑥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이곳은 서울 치고는 자연과 꽤 가까이 접한 곳이다. 집 근처에는 가볍게 오를 만한 산이 두 개 있고, 녹지 조성이 잘 된 숲길도 있었으며, 그 숲길에 이르는 데에 철길이 남아있어 제법 운치가 있다. 전철역 한 정거장 정도의 거리를 걸어가면 광명 시장이 나오는데, 그곳은 전통 시장답게 먹을거리부터 생필품에 이르기까지 이것저것 없는 것이 없고 가격도 저렴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삶의 활력이 넘친다.
그래서 한 동안은 광명 시장을 목적지로 한 산책의 날들이 지속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다시 광명 시장 근처의 이곳저곳을 뒤지고 다니기 시작했는데, 이게 웬일인가! 나라는 참새에겐 방앗간 못지않은 바로 그 장소, 바로 서점이란 공간이 전혀 예기치 못한 곳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과연 산책이란 행위에는 뜻밖의 우연이 깃들기 마련이다. <꿈꾸는 별 책방>. 이름만큼 예쁜 문을 가진 한 작은 서점이, 나를 향해 어서 들어오라고 속삭였다. 서점의 얼굴만으로는 그 규모와 소장 도서의 정도를 가늠하기 힘들었지만, 이미 호기심과 기대감에 잔뜩 발동이 걸린 나는 조심스레 책방의 문을 열었다. 젊은 주인장이 운영하는 독립서점 같았다. 아직 찬바람이 채 가시지 않은 겨울과 봄의 딱 중간 지점에서, 그곳은 따스한 난로의 훈훈한 공기로 나를 맞이했다. 주인장과 짧은 인사를 나누고 서점을 둘러보던 나는 이 서점만의 고유한 특성을 규정하고자 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독일어가 간간이 섞여 들리는 라디오 방송에서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평평한 책 가판대 위에는 대형 서점에 놓인 유명 출판사의 책들과는 다른 종류의 책들이 줄지어 놓여있다. 그런데 순간, 나는 그 서점만의 독특한 존재 방식과 마주하게 되었다. 책장의 책꽂이에 꽂혀있는 책들은 누런 갱지 같은 포장지에 한 권 한 권 정성스레 포장되어 있다. 겉봉에는 한 해를 이루는 각각의 날짜들이 각각의 책에 적혀있다. 그러니까 1월 1일의 책부터 12월 31일의 책까지가 서가에 달별로 꽂혀있었던 것이다.
책을 이미 포장해 둔 상태이기에 나로서는 그 책이 어떤 책인지 제목도, 표지도, 그 밖의 어떤 것도 알 수 없다. 그나마 다행히도 책을 감싸고 있는 표지에 적힌 몇 개의 문장들이 그 책의 정체에 대한 최소한의 단서들을 제공한다. 그렇다! 표기된 날짜에 태어난 이들을 위한 책이로군. 표기된 날짜와 같은 날에 태어난 작가들이 쓴 책들인 것이다. 참으로 신박한 생각인걸? 그간 내가 애용했던 중고 서점과는 전혀 다른 색감의 서점임이 확실했다.
나는 시험 삼아 내 생일에 해당하는 책들이 구비된 책꽂이 쪽으로 걸어갔다. 이런, 너무 높고 먼 곳에 비치되어 있군. 그래도 어떤 책인지는 반드시 확인해야지. 다행히 나와 동일한 생일을 가진 아티스트들을 몇 알고 있으니 어쩌면 쉽게 맞힐 수 있으리라. 이러한 추측을 하며 나는 이 재미난 수수께끼의 도전을 받아들였다. 드디어, 그리 크지 않은 한 권의 책이 손에 잡혔고, 나는 유일한 단서인 포장지 위의 몇 행을 읽자마자 바로 그 책의 실체를 파악했다. 게다가 그가 음악인이기까지 하다면 눈을 감고도 알 수 있다. 필경 존 레논이다.
나와 생일이 같다는 걸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그의 아들인 션 레논도 존 레논과 생일이 같다. 그래서 나와 또다시 생일이 같다. 그 책은 분명히 『존 레논 레터스』임이 틀림없다. 헌데 애석하게도 또 다른 수수께끼에 도전할 기회가 없다. 내 생일에 해당되는 칸에는 오직 이 책 한 권만이 전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첫 수수께끼를 별 어려움 없이 풀어서일까. 갑자기 이 놀이가 시시해져 나는 서가의 이곳저곳을 돌며, 가까운 친구, 가족들의 생일에 해당하는 작가들의 책들을 집었다 놓았다 하며 시간을 보냈다. 책의 겉봉을 감싸두니 이번에는 책의 얼굴들이 보고 싶어 졌고, 내 선택을 어디까지 우연에 맡겨야 할는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아 계속 주저하게만 되었다.
표지를 가려 두었기에 책의 선택을 상당 부분 우연에 내맡긴 듯이 보이지만, 막상 거기에는 어느 정도의 필연이 전제된다. 그 선택은 누군가의 생일이라는 필연적인 각인에 준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즉 이 우연은 필연을 전제해야만 발동하는 그런 우연이다. 보통 우리가 서점 가판대에 나열된 책들과 만나면서 이루어지는 우연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우연인 셈이다.
그렇다면 책의 내부와 외부를 노출시킴으로써 발동하는 우연과, 그것들을 차단함으로써 발동하는 우연, 둘 중 어느 편이 더 순전한 우연에 가까울까? 책의 내부와 외부를 차단한 우연에는 작가의 생일이라는, 훗날 책의 주인이 될 이와 애초부터 연관된 필연이 전제된다. 반면 일반 서점에 진열된 오픈된 책들은 전적으로 책에 대한 개인의 취향을 발휘해 고를 수 있다는 점에서 앞선 예와는 다른 종류의 필연이 펼쳐질 가능성이 있다. 즉 전자가 정해진 필연이라면, 후자는 미래에 펼쳐질 필연을 예고 한 달까.
이 흥미로운 작은 서점은 선천적으로 각인된 생일이라는 필연과, 후천적으로 형성된 취향이라는 필연 중 어떤 것을 선택할지 내게 질문하며, 책과 내가 맺을 수 있는 서로 다른 우연의 장을 마련해 주고 있었다. 이 기이한 공간은 내게 우연에도 어떤 층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그것은 선택이 제한된 우연과, 선택이 오픈된 우연이다. 그리고 두 우연 중 어느 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곧 그것이 야기하게 될 필연의 성격 또한 달라질 것이다.
둘 중 내가 선택한 것은 오픈된 우연 쪽이었다. 책의 겉과 속이 ‘모두’ 노출된 채 진열된 가판대에서 나는 한 권의 책을 골라 들었다. 『공부하는 삶』이라는 어느 프랑스 작가의 저서였다. 깃털 펜이 그려진 은은한 겨자 빛의 옛스러운 표지에 마음이 끌렸다.
나 역시 기나긴 시간을 오로지 공부하며 살았다. 나는 과연 잘 살고 있었는가? 제대로 공부해 온 걸까? 그에 대한 해답을 쥐고 있을 것만 같은 책이었다. 지은이 앙토냉 질베르 세르티양주는 공부하는 삶을 사는 이들을 ‘지적 소명’을 받은 사람들이라 표현했다.
“지적 소명은 다른 모든 소명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본능과 능력, 이성으로 판단해야 하는 일종의 내적 충동에 새겨져 있다. 우리의 기질은 신체가 받아들일 수 있는 화합물을 결정하는 화학적 특성과 같다. 소명은 요청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소명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고, 우리의 제1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 그 부름은 야망이나 어리석은 허영심이 아니라 이기적이지 않은 동기에 따라 당신의 지적 삶에 들어서는 것을 전제로 한다. 경솔한 사람만이 세상에 널리 이름을 떨치라는 꼬임에 넘어간다. 야망은 진리를 자기 아래 둠으로써 영원한 진리를 거스른다.”
이 대목을 읽던 중 마음속에 커다란 울림이 일었다. 야망까지는 아니더라도, 학업과 직업을 연결 지으려던 열망이 내게도 한때는 있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고 나니, 비로소 진정한 학문의 기쁨에 다가선다. 그로 인해 내가 누릴 수 있는 정신적 자유란 침으로 광활한 것이었다. 나는 비로소 그 무엇에도 쫓기지 않은 채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가 아닌, 진정한 나 자신을 위해. 야망이나 어리석은 허영심보다는 진리 자체를 추구하는 삶을 위해. 모든 이해관계로부터 벗어난 이성의 자유를 실감한다. 이것이야말로 공부의 진정한 참맛이다. 우연이 관장하는 그 작은 서점에서, 언젠가부터 필연이 되어버린 나의 ‘공부하는 삶’과 지금에서야 제대로 조우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은 왜일까.
나는 이 책을 선택하기로 결심하고 주인장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책에 종이 한 장이 끼워져 있었다. 누군가 타이프라이터로 타이핑한 글씨가 박힌 누렇고 넓은 종잇장이었다. 뒷면에는 프랑스어로 프린팅 된 활자들이 담겨있다. 마침 그 글의 제목은 '당신을 위한 작은 선물(Un petit cadeau pour vous)'이다.
“혹시 이 종이 가져도 될까요?”
타이프라이터의 글씨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내가 주인장에게 물었다.
“예. 가지셔도 되는데 제가 아직 타이프라이터 사용이 서툴러서 잘 치지는 못했어요.”
수줍게 주인장이 답했다. 나는 그런 건 얼마든지 괜찮다고 말하고는, 그 종이를 그 책의 책갈피로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이사 오셨어요?” 밝게 웃으며 주인장이 물었다.
“예. 맞아요.” 나도 웃으며 대답했다.
그것이 이 서점과의, 그러니까 두 종류의 우연과 그것을 발동시킬 수 있도록 재단된 필연과의, 그 덕분에 내가 마음껏 사색을 즐겼던 이 공간과의 첫 만남이었다. 역시 사색을 위한 공간은 좁고 고요한 것이 제격이다. 공부하는 삶을 위한 공간도 마찬가지다. 마치 새로 이사한 내 집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