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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노르망 Nov 25. 2023

산책하다 산 책

열여덟 번째 산책로 - 『만남이라는 모험』



열여덟 번째 산책로 - 『만남이라는 모험』 



 『만남이라는 모험』은 기이하게도 몇 번의 난관 끝에 겨우 내 손에 들어온 책이다. 책의 제목처럼 나는 이 책을 최종적으로 소유하기까지 몇 번의 모험을 거쳤다. 거기다 이 책은 내게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선사해 주었다. 수려한 문장과 사색을 유도하는 방식이 프랑스식 에세이의 정수를 보여준다.  





이 책을 처음 만난 건, 바로 이전 글 『공부하는 삶』이라는 산책로를 마련해 주었던 광명의 작은 서점에서였다. 서문을 읽고 몹시도 마음에 들어 골랐지만, 그와 딱 동시에 마음에 들었던 윌리엄 모리스의 『아름다움을 만드는 일』을 최종적으로 선택하게 되어, 『만남이라는 모험』은 애석하게도 잠시 보류 항목에 놓였다. 그대로 몇 개월이 흘렀음에도 이 책은 나의 희망 도서 목록에서 꿋꿋하게 나를 지켜 봐 주었고, 나 역시 그 시선을 기억했다. 


어느 날 한 대형 서점에 들렀다가 다시금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 이 책을 사기 위해 서점에 갔던 건 아니었다. 그저 우연히 이 책과 또다시 마주치게 된 것이다. 우연찮게 몇 번이고 마주치게 되는 그런 사람을 만난 양 몹시 반가운 마음이었다. 드디어 이 책을 살 때가 되었구나 싶어 책을 살펴보던 중, 아뿔싸! 책의 치명적인 약점을 발견하고야 만 것이다. 


내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중간이 약간 울어 척추가 휘어진 책이다. 습기 탓인지 보관 탓인지 아무튼 이런 책들의 특징은 중심축이 올바르지 못해 매번 정기적으로 구부려주어야 한다는 데 있으며, 그 때문에 책을 읽을 때마다 신경이 쓰여 온전히 책에 집중하기 힘들다는 단점마저 지니고 있다. 


한동안 고심하던 나는, 다시 두 번째로 이 책을 보류 도서 목록에 포함시켰다. 부디 세 번째까지 이르게 되진 않기를 내심 기원하면서. 그러고 보니 광명의 서점에서도 비슷한 이유로 그 책을 선택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책의 잔잔하면서도 강렬했던 서문이 내 뇌리에 남아있던 까닭에, 근일 내에 이 책과의 관계에 있어 어떤 식으로든 종지부를 찍기로 결심했다. 


시내에 약속이 있어 머지않아 또 다른 대형 서점에 들르게 되었을 때, 나는 그 책과 세 번째로 만났다. 서문을 다시 읽고 이번에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책을 사서 읽어나가겠노라 굳게 마음먹었다. 마지막으로 책의 상태를 점검했다. 그런데 이 책 역시도 중심축을 기준으로 약간 울어 있는 것이었다. 지난번에 보았던 책과 그 정도는 비슷했지만, 그 사실은 이제 더 이상 내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시 읽은 서문이, 더 이상은 이 책 읽기를 미루지 말라고 내게 당부했다. 나는 그 충고를 받아들이고, 더 이상은 이 책을 거부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책과 함께 돌아오던 지하철 안에서, 오늘 시내에서 만났던 한 사람에 대해 생각했다.  


그분과의 인연이 시작된 건 2010년부터였으니 어언 13년이 되어간다. 마지막으로 만났던 것은 2017년 가을, 그러니까 근 6년 만에 재회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과 얼마 전에 만난 사람과 이야기하듯 자연스러운 대화 속에서 시간은 훌쩍 흘렀다. 헤어져 있던 시간이 그토록 길었던 까닭에, 마지막 만남과 지금의 시간을 어떻게 연결해야 할지 못내 두려웠던 마음도, 막상 반가운 얼굴 앞에서는 무색해져 버렸다. 그간의 좋고 나빴던 일들에 대해 우리는 장시간 이야기했다. 


끊어졌던 만남을 다시 잇는 일도, 만남의 시작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다. 만남이라는 일이 모험인 이유도, 그 만남이 차후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이 책과의 보류되었던 만남이 이어진 것도, 어쩌면 오늘 그분을 다시 만났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책장을 넘기는 내내 신비로운 기분에 사로잡혔다. 책 속의 내용들 역시, 사람과의 만남이 야기한 기적과도 같은 순간들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인 샤를 페팽은 현대 철학을 강의하는 선생이 되었지만, 원래 이과를 지망했던 학생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그는 어느 날 우연히 철학 선생님과 나눈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 관한 대화로 말미암아 인생의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문과로 전향하는 편이 어떻겠냐는 선생님의 제안으로 이과 반에서 문과 반으로 옮긴 것이다. 이 중대한 결심은 물론 그가 철학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겠지만, 철학보다 먼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철학 선생님이었다.


“만약 내가 선생님의 인간적인 성품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지 않았다면, 과연 헤겔이나 스피노자의 심오한 사상에 대해 그토록 강한 궁금증을 품을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라고 그는 쓴다. 그의 새로운 모험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작가는 선생님과 오랜 세월 간 교류하며 친구가 되었고, 선생님이 돌아가셨을 때에는 장례 집행인이 되었다.


그를 철학이라는 학문으로 이끈 또 다른 계기는 바로 카뮈의 『이방인』이다. 세상에.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라니! 너무나도 반가운 대목이었다.



알베르 카뮈(1959)와 그의 저서 <이방인>(1957)



불행히도 저자처럼 『이방인』을 둘러싸고 누군가와 절실한 교감을 나룰 기회가 내겐 없었지만, 이 작품을 읽고 느꼈던 감흥만큼은 또렷이 기억한다. 급기야 나는 카뮈의 작품 전반으로부터 철학서에까지 빠져들었고, 내 삶의 일부를 카뮈의 미학 사상을 연구하는 데에 바쳤다. 그러니 이 부분에서 내가 얼마나 환희에 찬 웃음을 지었겠는가! 『만남이라는 모험』이라는 이 책을 좀 더 일찍 읽지 않은 것을 얼마나 아쉬워했겠는가! 


특히 작가가 카뮈에 대해 설명하는 다음의 문장들에서는 벅찬 감동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처음 『이방인』을 읽고 나서 느꼈던, 카뮈의 삶과 문학을 탐닉하며 얻었던 감흥을 어떤 평론가의 글보다 일목요연하고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나는 태양을 바라볼 때 기상적인 지식이 아닌 다른 것을 보기 위해 계속해서 카뮈의 글을 읽어야만 했다. 카뮈를 만나기 전에 태양은 내게 있어서, 그저 커다란 모자나 선크림으로 그 강렬한 빛을 가리고 차단해야 하는 대상일 뿐이었다. 카뮈가 묘사했던 태양을 만난 이후로 나는 태양 속에서, 어려운 시절을 함께 버틸 수 있는 동맹 관계의 가능성을 찾아냈다.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 환한 빛 속에서 세상을 보는 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요약하면 나는 카뮈를 통해서 태양과 만났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나는 그의 책들을 통해 내가 나중에 골몰하게 될 문제의식들을 발견했는데, 그것들은 내 삶에 있어 거의 하나의 윤리로 자리 잡게 될 것들이었다. 그 윤리란 나쁜 상황 속에 내몰렸을 때 상처받고 낙담하게 될지라도 태양의 환한 빛 속에 머물려고 노력할 것, 삶이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역시 삶을 사랑할 것,이었다.”



직접 만나보지 못한 작가와 이 같은 정서적 합일이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자 신비였다. 오랜만에 만난 내 오랜 지인과, 그와의 만남 덕분에 세 번째로 만날 수 있었던 이 책과, 이 책 덕분에 만난 작가의 아름다운 문장들과, 다시 이 문장들이 일깨운 카뮈에 대한 기억이, 그로 인한 감동이 파도처럼 나를 덮쳤다. 



“한 사람이 다른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두 사람의 세계를 전복시키고 두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하나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그때 낯선 무언가가 생겨나는데, 그것은 우리가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기습적으로 사로잡는다. 그것이 바로 하나의 만남이 가져다주는 충격이다.”



한 사람, 한 권의 책, 그들이 야기하는 내면의 동요. 자아의 변화. 우연이 필연이 되는 과정에는 이런 모험이 필수적이다. 또한 그것은 우리가 알게 모르게 매일같이 경험하고 있는 모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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