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르노르망 Nov 26. 2023

산책하다 산 책

열아홉 번째 산책로 - 『단순한 기쁨』



열아홉 번째 산책로 - 『단순한 기쁨』  



 앞선 산책로에서 기왕 만남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내게 매우 특별한 만남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한다. 이 만남은 단지 책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단정 짓기엔 보다 복잡한 사연을 품고 있다. 이 이야기는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에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프랑스어를 전공하게 된 나는 모든 문화생활의 반경을 점차 프랑스라는 나라로 수렴시켜 나갔다. 이 시기의 나의 문화적 행보란 그야말로 모든 장르의 예술 앞에 ‘프랑스의’라는 전제를 다는 것으로 점철되었다. 언어로 프랑스를 알아간다는 데에 대한 쾌감도 있었지만, 해당 언어를 이해함으로써 더욱 ‘잘’ 보이는 문화적 언어들에 대한 성취감에도 나는 민감했다. 


어느 날 집에 도착한 신문을 펼치며 개봉 영화들을 살펴보던 중이었다. 그 시절 신문 지면의 하단에는 항상 영화 광고들이 줄줄이 소개되곤 했는데, 거기에서 영화의 개봉일과 장소, 시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갑자기 시선을 사로잡는 영화 광고 하나가 눈에 띄었다. 제목은 <겨울 54>. 포스터 속에는 검은 베레모를 쓰고 털목도리를 한, 결의에 찬 남성이 관람자를 향해 눈길을 던진다. 그 아래 일군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


                                                                                    



이 또한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의 이야기일까? 아니, 이 이미지는 분명 어디서 본 듯하다. 그렇다. 예전에 보았던 어느 프랑스 영화의 차기 개봉작 예고편에서 난 확실히 저 사람을 보았었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였고, 어려운 이들을 위해 헌신한 사람의 이야기라고 했었지. 그 광고를 본 후 이 영화를 보아야겠다는 의무감이 무의식 속에 잠겨 있다가 신문의 지면 광고를 본 순간 솟구쳐 오른 것이다. 반드시 표를 예매하고 보러 가리라! 나는 친구와 조만간 그 영화를 보러 가기로 계획을 세웠다. 


며칠이 흘렀을까. 겨우 일정을 맞추어 친구와 도착한 극장(아마도 씨네 하우스였을 것이다)은 오후여서인지 너무도 한산했는데, 그 한산함은 도를 지나쳐 불안감을 야기할 정도였다. 게다가 우리를 반겨 주리라 기대했던 그 사나이의 얼굴이 그려진 극장 간판은 막상 보이지 않고, 생소한 간판들만 눈에 띄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당황한 나는 매표소 직원에게 물었다. 


“<겨울 54>라는 프랑스 영화를 보러 왔는데요.” 직원은 내게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무. 슨. 영. 화.라고요?” 

“<겨울 54>요. 신문을 보고 왔는데, 며칠 전 개봉했다고 하던데. 프랑스 영화인데요.” 

“그건 모르겠고, 암튼 <겨울 54>라는 영화는 안 해요.”


나는 난처해져서는 친구와 그저 마주 보며 서 있었다. 내가 보러 오자고 한 영화였기에 미안한 마음도 컸다. 


“그럼 여기까지 왔으니 아무 영화라도 보고 가자.” 친구가 말했다.

“혹시 프랑스 영화 개봉한 것 있나요?” 나는 직원에게 다시 물었다. 

“뭐 하나 개봉한 것 같긴 하던데 옆으로 가서 포스터 한 번 확인해 봐요.”


대체 이게 무슨 날벼락이람!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신문 지면에 광고를 하고 있던 영화가 왜 지금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것인가?(이상하게 들리지만 당시엔 간혹 일어났던 일이다) 아니면 내가 장소와 개봉 영화를 착각했나? 아니야. 그럴 리는 없어. 항상 몇 번을 확인하는데! 속상하다 못해 억울해진 마음을 잠재우며 친구와 나는 다른 개봉 영화들의 극장 간판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곳에 걸린 어느 프랑스 영화의 간판에 눈길이 멈췄다. 이름하여 <시라노 드 베르주락>. 제라르 드파르디유 주연의 영화였다. 그것만으로도 일단 이 영화는 볼 만하겠군. 주인공들의 복장이나 분위기로 미루어 시대극이 분명했다.





친구와 나는 결국 그 영화를 보기로 하고 한가진 오후의 객석을 채우러 극장 안으로 들어섰다. 객석이 예상대로 한산했기에 조용히 영화에 몰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건 또 웬일인가! 우리는 점차 그 영화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안타까워하다, 웃다가, 결국 마지막에는 눈물을 줄줄 흘려대기 시작했다. <겨울 54>로 인한 억울함과 의아함 따위는 내던진 지 오래였다. <겨울 54> 속 사나이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역시 제라르 드 파르디유가 한 수 위야. 나는 이 영화를 본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으리라. 친구와 나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아까와는 전혀 다른 기분으로 서로를 말없이 바라봤다. 


“이 영화 정말 잘 본 것 같지?” 내가 묻자 친구도 대답했다. 

“응, 정말로. 너무 감동적이었어.” 



<겨울 54>의 대체작이었던 영화 <시라노>를 처음 보았을 때의 감동 역시, 그토록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아직 생생하다. 이러한 드라마틱한 역전극으로 말미암아, <겨울 54>는 잠시 내 기억 속에 숨은 채 오래오래 묻혀 있었다. 이 영화와, 이 영화의 주인공에 대한 또 다른 감동적인 이야기와 우연히 재회하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늘 들르던 중고 서적 코너에서 발견한 『단순한 기쁨』이라는 책 덕분이었다.





나는 책날개에 소개된 이 책의 저자 피에르 신부의 약력을 읽는 순간, 그가 바로 그토록 오래전, 내가 그토록 보고 싶었으나 보지 못했던 <겨울 54>의 주인공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겨울 54>는 실업자, 무주택자들과 같이 사회의 소외된 계층을 위해 평생을 바친 진정한 휴머니스트 피에르 신부의 삶을 다룬 영화로, 1989년 세자르 상을 수상했다. 


피에르 신부는 프랑스 리옹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19세에 카푸친 수도회에서 성직자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 후 모든 유산을 포기한다. 2차 대전 당시 참전했을 뿐만 아니라 레지스탕스로도 활동한 경력이 있는 그는, 이후 집 없는 빈민들과 소외 계층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고자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정치인으로서의 삶을 접고 부랑아들과 노숙자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직접 구호 활동을 펼친다. 전 세계인들이 기억하고 사랑하는 그의 모습은, 파리 근교의 작은 공동체를 시작으로 집 없는 이들과 전쟁고아들을 위한 안식처를 마련한 ‘엠마우스 운동’의 아버지로서의 면모다.



젊은 날의 피에르 신부



‘엠마우스 운동’은 성서 속에 등장하는 ‘엠마오의 두 제자’ 이야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후, 예수의 제자들은 겁에 질려 뿔뿔이 흩어진다. 그때 달아나던 두 제자의 눈앞에 한 명의 나그네가 나타난다. 두 제자는 예수의 죽음에 대해 알지 못하는 여행객에게 그 슬픈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때 나그네는 고난을 통해 구원이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밤이 되어 숙소에 이른 두 제자는 식사를 하기 위해 들어가지만, 나그네는 가던 길을 계속 가고자 한다. 그때, 두 제자가 그 나그네에게 건넨 말, 피에르 신부가 가장 좋아했던 말은 이것이다. “이젠 날도 저물어 저녁이 다 되었으니 여기서 우리와 함께 묵어가십시오.” 


식탁에 앉아 기도를 올린 후, 나그네가 빵을 나누어 주자, 두 제자는 비로소 그 나그네가 예수 그리스도였음을 눈치챈다. 도망치던 제자들은 그들을 수배 중인 살벌한 예루살렘으로 기꺼이 선회한다. 예수의 부활을 알리기 위해서다. 지치고, 가난하고, 배고픈, 집 없는 이들을 예수라 생각하고 섬기는 정신이 바로 피에르 신부가 평생에 걸쳐 실천한 엠마우스 운동의 본질이다. 


영화의 제목이 왜 <겨울 54>였는지도 이제 이해가 간다. 유달리 혹독했던 1954년 겨울, 파리에 한파가 닥쳐 노숙자들의 사망 사고가 늘어갈 때, 피에르 신부가 룩셈부르크 라디오 방송을 통해 한 연설은 전 세계인을 감동시켰다.



라디오 방송을 하는 피에르 신부



찰리 채플린을 비롯한 세계의 유명 인사들과 시민들의 성금이 모였고, 프랑스 각자에서는 자원 봉사자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그의 종교와 성직자로서의 직책을 떠나, 오직 한 인간으로서 피에르 신부가 행한 선행, 나아가 세상의 부당함과 불평등에 맞선 그의 저항 정신은 숭고하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안위를 꿈꾼다. 아니, 그렇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이기에’ 우리는 쾌락만을 추구하는 삶을 거부할 수 있다. 타인이 겪는 아픔과 부당한 처사에 공분하고 함께 힘을 모아 세상을 바꾸어 나갈 수 있다. 피에르 신부처럼 얼마든지 편안하고 안온한 삶을 누릴 수 있지만, 타인들을 돕기 위해 그것들을 기꺼이 포기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피에르 신부가 그랬듯이, 타인을 위해 목숨을 걸 수도 있다. 



“나는 인간의 마음이 상처 입은 독수리 같다고 여긴다. 그림자와 빛으로 짜여져, 영웅적인 행동과 지독히도 비겁한 행동을 둘 다 할 수 있는 게 인간의 마음이요, 광대한 지평을 갈망하지만 끊임없이 온갖 장애물에, 대개의 경우 내면적인 장애물에 부딪히는 게 바로 인간의 마음인 것이다.”



실천하는 성직자이자 실천하는 지식인, 프랑스가 민주주의의 첫 발을 어느 나라보다 먼저 내딛을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이러한 앙가주망 정신에 의한 게 아니던가. 베레모를 쓴 피에르 신부의 모습은 그 자체로, 프랑스가 가장 프랑스다웠던 시기의 정신을 보여준다.



노년의 피에르 신부



『천국의 열쇠』 속 치셤 신부의 실천적인 삶, 네가 곧 나이고 내가 곧 너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 휘트먼의 글들,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성서 속의 가르침을 행한 피에르 신부의 삶은 결국 하나의 궤적을 그리고 있다. 앞서 언급했던 『공부하는 삶』의 저자 앙토냉 질베르 세르티앙주는 마치 미래에 존재할 피에르 신부의 삶을 미리 격려하듯 다음과 같이 썼다.



“진정한 지성인은 빈자들이 정처 없이 돌아다니며 고통을 받는 이 지구의 이미지를 언제나 눈앞에 떠올릴 것이다. 그가 가진 빛이 그에게 성직을 수여한다. 그가 얻으려 애쓰는 빛은 그가 그 빛을 나눌 것이라는 암묵적 약속을 가정한다.” 

                                                                                                          - 『공부하는 삶』 중에서



이제야 왜 내가 오래전부터 피에르 신부의 이야기에 그토록 귀 기울이고 싶어 했는지 알 것 같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결국에는 더욱 내밀히 만날 수 있었다는 데에, 마치 기적을 맞이한 듯 감사함을 느낀다. 피에르 신부가 자신이 레지스탕스 시절에 만났던 작가 알베르 카뮈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도 우리가 은연중에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영화 <겨울 54>를 보지 못한 덕택에 보게 되었던 영화 <시라노>. 영화 <시라노> 덕택에 접하게 된 에드몽 로스탕의 원작, 희곡 『시라노』 - 그 책 속의 주인공 역시 타인을 위해 희생한 순애보의 삶을 보여주지 않는가! -를 피에르 신부의 책 『단순한 기쁨』 옆에 나란히 꽂는다.





나는 그 두 권의 책이 함께 꽂혀있는 책장을 대할 때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책과 책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기묘한 만남의 섭리에 대해 생각한다. 그 두 책은 아무래도 영영 서로의 곁에 있는 편이 좋을 듯하다. 그 편이 진작 만나고 싶었음에도 오래도록 만나지 못했던 피에르 신부에 대한 그간의 회한을 극복할 방편이 되어 줄 테니까.












작가의 이전글 산책하다 산 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