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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노르망 Dec 02. 2023

기나긴 마지막 산책로
- 『빛 혹은 그림자』



기나긴 마지막 산책로  - 『빛 혹은 그림자』  



 에드워드 호퍼와의 인연이 시작된 지도 어언 30년이 다 되어 간다. 20세기 현대 회화를 다룬 미술사 책에서였던가, 우연히 마주했던 그의 작품 <뉴욕의 방>은 처음 본 순간 나의 시선을 사로잡고, 곧이어 나의 마음을 사로잡더니, 결국 그 강렬한 첫 만남 이후부터 지금까지 호퍼에 대한 꾸준한 관심을 지속하게 해 준 원동력이 되었다. 


뉴욕의 작은 방에 두 남녀가 앉아있다. 남성은 신문을 보느라 여인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여인은 피아노 의자에 앉아 무심히 건반 하나를 두드려 본다. 그녀는 남성을 보고 있지 않지만, 그가 자신을 바라봐 주었으면 한다. 어떻게 그것을 아느냐고? 호퍼는 둘 모두 상대방을 바라보고 있지 않는 구도를 택했지만, 관람자로 하여금 그녀가 그의 시선을 받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게’ 그릴 수 있는 드문 화가이다. 



에드워드 호퍼, <뉴욕의 방>(1932)



같은 공간. 그것도 넓지 않은 한 공간 안에 자리한 남녀의 심리적 거리감을 호퍼는 너무도 생생히 묘사하고 있다. 현대인의 소외와 고독을 이토록 잘 표현한 화가는 드물 것이다. 마치 영화나 드라마의 스틸 컷을 연상시키는 그의 그림 각각에는 뭔가 독특한 사연들이 맺혀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저 보통의 사람들을, 순식간에 그림 속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버리는 능력’. 호퍼의 그림에 대한 나만의 한 줄 평이다. 


이러한 미적 경험이 오직 나만의 것은 아니었던지 호퍼의 회화 작품을 소재로 한 영화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이 제작되었고, 그의 회화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유명 작가들이 그의 한 작품씩을 주제로 쓴 단편 소설 모음집을 출간했다. 그 책의 제목이 바로, 우리의 마지막 산책로가 될 『빛 혹은 그림자』이다. 이 책을 만난 것도 벌써 수년 전의 일이다.


이 책의 등장을 알고 난 이후부터 줄곧 읽고 싶다는 열망에 시달렸지만, 미처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즈음의 어느 가을날 저녁에 근처 동네로 산책을 나갔다. 다리 하나만 건너면 이어지는 이웃 동네를 탐험해 보기로 한 것이다. 폭이 넓은 보도를 흥겹게 지나가던 중, 후미진 구석에 딱 내 마음에 드는 분위기로 불빛이 밝혀진 것이 보였다. 불빛을 따라가 보니, 이런! 내가 그토록 애정하는 장소, 바로 서점이 아닌가! 어떻게 이렇게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이토록 멋진 장소가 숨어 있는 거지?


기쁨을 억누르며 살며시 서점으로 들어선 나는, 그곳이 보통의 서점과는 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음을 금세 눈치챘다. 그것은 책들이 아니라 ‘냄새’ 때문이었다. 그것도 책 냄새라기보다는 다른 냄새다. 커피 향과 어우러진 뭔가 색다른 향기가 이 책방에 대한 해석을 난감하게 만들었다. 


이 혼돈 속에서 잠시 정신을 못 차리고 서 있자니, 누구보다도 서점에 잘 어울리는 주인장이 다가와 나의 혼돈을 정리해 주었다. 서점에서는 책도 구매할 수 있지만, 커피도 마실 수 있고, 향수를 구경할 수도 있으니 천천히 둘러보라는 것이다. 그곳은 [Prescent.14]라는 문패를 걸고 있었다. 이 비밀스러운 공간을 발견한 흐뭇함에 빠진 나는 크지는 않지만 제법 다양한 분야의 서적들로 내실 있게 채워진 그 서가에 매혹되었다. 소위 베스트셀러로 구분되는 책들만이 아니라 독립 출판사에서 출간된 보기 드문 책들도 구비되어 있어 책 한 권 한 권에 마음이 갔다. 문득 그 서점의 커피 향이 궁금해졌기에 일단 커피를 주문하고 서가를 여행했다. 그 서가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었던 책이 바로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들을 주제로 한 단편 소설집 『빛 혹은 그림자』였다. 





취향에 맞는 서점을 발견했다는 흥분감과, 바로 그곳에서 구매를 꿈꾸던 책을 발견했다는 기쁨이 어우러졌다. 그 기분에 취한 것인지, 그곳의 향기에 취한 것인지, 여러모로 도취된 나는 뒤이어 또 다른 책 『발레리 시선』을 고르고, 그것도 모자라 처음 접하는 만화가의 『우리 이제』까지 구입하기로 결정하고는, 커피 향기가 식지 않도록 내가 찜해 둔 창가의 작은 테이블에 앉았다. 얼마 안 있어 한 여인이 서점에 들어섰다.


사실 그 여인은 내가 커피를 주문하고 막 자리를 잡았을 때 서점에 들어올까 말까를 고심하며 망을 보듯 서점 근처를 서성이고 있었다. 그녀의 주저함이 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대로 전해졌다. 커피를 마시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용기를 얻어서인지, 아니면 비로소 그 시점에서야 결심이 섰던 것인지, 드디어 서점에 들어 선 여인에게 나는 약간의 동질감을 느꼈다. 그리고 마음 한 편으로 격려했다. 


‘당신도 여기가 마음에 드실 거예요. 용기를 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만큼. 좋은 책도 많고, 향기도 좋고.’ 


그런데 그녀는 어딘가 초조하고 불안해 보였다. 내 쪽을 흘끔거리는가 하면, 주인장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기도 했다. 책을 둘러보고는 있는데, 어째 책을 고르는 데 완전히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타인을 관찰하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차마 놓치기 힘든 장면이었다. 


주인장은 그녀와 나를 동시에 신경 쓰는 듯했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타인에 대한 배려의 방식을 상상하고 있는 것이리라. 잠시 구매한 책들을 펼쳐보다가, 현재 이 서점에서 가장 불필요한 사람은 혹시 내가 아닐까 하는 나만의 배려 방식이 떠올랐다. 


같은 여자로서의 육감 때문인가. 좀 전에 들어온 그녀가 뭔가 주인장과 할 말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친 것이다. 분명 서로 잘 아는 사이는 아닌 것 같다. 그러니 밖에서 들어오길 그토록 주저했겠지. 그럼 둘은 대체 어떤 관계이지? 그녀의 품 안에는 이미 고른 책들이 가득했고, 그녀는 어딘가 정착해야 할 것처럼 보였는데, 커피 마시는 긴 테이블이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 곁에 앉기란 다소 불편한 노릇이었으리라. 


또 다른 가설도 가능하다. 그녀가 주인장을 마음 깊이 흠모하고 있던 차에 드디어 오늘 고백을 하려던 찰나, 나라는 방해물로 인해 이 난감한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내 멋대로 이런 결론을 내리고는, 남은 커피를 억지로 마시고 서점을 나섰다. 주인장은 내게 책을 구매했으니 작은 향수 하나를 고를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그곳에 남아>라는 이름의 향수를 고르고는, 마음 같아서는 잠시 더 '그곳에 남고' 싶었던 책방에서 자진해 쫓기듯 나와 버렸다.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나는 전혀 모른다.


다만 애석하게도 그 서점은 얼마 안 가 없어졌고, 다른 상점으로 대체되었다. 그 후로도 가끔 이웃 동네를 산책하곤 했는데, 그 서점이 있었던 자리를 지날 때마다 깊은 아쉬움과 더불어 그날 저녁의 난감했던 분위기가 떠오른다. 마치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 마냥, 그 작은 서점에서 그 시간 존재했던 우리들 각각은 서로 심리적 거리감을 느꼈으니까. 


때때로 엿보는 사람의 구도를 차용했던 호퍼의 시선처럼, 나 역시 창문을 통해 그 여인의 주저함을 엿보았고, 그 주저함의 원인과 나를 견제하던 시선을 연결시켜 해석했다. 그 둘은 내가 나간 이후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이 모든 건 그저 호퍼의 그림을 지극히 사랑한 나의 망상에 불과했나? 


그러나 막상 『빛 혹은 그림자』를 읽어나가다 보니, 이런 나만의 상상은 그다지 병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안도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나를 호퍼에게로 이끌었던 바로 그 그림, <뉴욕의 방>을 소재로 한 단편을 읽었을 때다. 


<뉴욕의 방>을 집필한 소설가는 다름 아닌 스티븐 킹이었다. 처음에 그는 단편 소설에 대한 청탁을 받았을 때 거절했지만, 그 단편의 주제가 호퍼의 작품들이라는 것임을 알고 수락했다고 한다. 나처럼 그가 <뉴욕의 방>을 좋아한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이 단편집에서 가장 기대했던 이 작품에서 내가 읽은 것은, 바로 스릴러, 공포, 미스테리 장르 작가라는 타이틀을 너무 의식한 작가 스티븐 킹의 망상이었다. 그는 <뉴욕의 방>을 자기 식대로 해석했다. 철저히 자기 식으로. 그것도 범죄 스릴러마냥. 실망스러웠다. 스티븐 킹의 소설을 읽고 이토록 킹 받기는 처음이다! 적어도 <뉴욕의 방>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만큼은 그가 자신만의 세계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작품은 다른 사람도 아닌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이 아닌가. 거기다가 <뉴욕의 방>은 가장 사랑받는 작품들 중 하나가 아닌가! 


[Prescent.14]에서 이 책을 구매한 것이 꽤 오래전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마지막 산책로를 『빛 혹은 그림자』로 마감하는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마지막 안구 주사를 맞은 지 한 달 후, 주사의 효과를 확인하기 위해 병원을 방문했을 때, 나는 상태가 ‘더는 악화되지 않았다’는 모호한 진단을 받았다. 첫 번째 안구 주사 이후 망막 부종 증상이 서서히 안정기에 접어들었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이전만큼의 효과를 보지 못한 것이다. 우그러진 종이를 편다고 그 흔적이 없어지지는 않듯이, 어차피 한 번 손상된 망막이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더 좋아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놓고 싶진 않았지만 그 또한 뜻대로 되지 않았다. 에드워드 호퍼의 한국 전시회가 곧 시작될 거라는 소식을 접한 것이 바로 그날이다.  


순간 이대로 꾸준히 시력이 나빠져 간다면 더 이상 호퍼의 작품과 만나기 힘들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엄습했다. 어디 만날 수 없는 것이 호퍼의 작품뿐이겠는가. 시각 예술은 시각이 없이는 감상이 어려워진다. ‘잃기 전에 간직해야 한다’는 다급함에, 채 회복되지 않은 시력은 제쳐두고 전시회 표를 예매했다. 무엇보다 현재의 상황에서 당장 만나야 할 사람은 에드워드 호퍼였다. 그는 내가 ‘끝까지 보아야 할 이유’, 시력을 잃을지도 모르는 병 때문에 ‘굴복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알려줄 사람이다. 평범한 이들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는 그의 그림들을 대면한다면, 내가 삶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체감하게 될 것이다. 


오래전 파리 유학 시절에 관람했던 에드워드 호퍼의 전시회가 떠올랐다. 그 당시에는 얼마나 많은 전시회를 보러 다녔던가. 회화에 대한 사랑과 그에 대한 연구로 점철되었던 나의 젊은 시절. 아직 눈의 위기를 실감하지 못했던 청춘의 싱그러운 감각. 호퍼의 작품과 처음으로 마주했을 때의 환희를 다시 되찾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2023년의 봄, 호퍼의 서울 전시회가 시작되던 날, 그렇게 나는 미술관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호퍼가 살았던 1930년대 뉴욕의 풍경과 그 당시 삶의 정서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이 전시회는 호퍼의 작품 세계 전반을 연대기적으로 배치했고, 미국 휘트니 미술관에 소장된 작품들을 대거 전시하고 있어서인지 예전에 파리에서 관람했던 호퍼 전시회보다 어떤 면에서는 더욱 풍요롭고 일관된 면이 있었다. 특히 흔히 접하기 힘든 호퍼의 초기 작품들, 그가 작품을 구상하며 그려두었던 데생과 스케치들을 바라보는 기쁨이 상당했다. 



호퍼의 스케치들


호퍼가 스린 포스터들



자신의 화풍을 찾아나가며 꾸준히 그려 온 습작들, 그간 본 적 없었던 일러스트 작가 시절의 희귀한 포스터들, 그가 파리에서 체류하던 시절에 그린, 내게도 익숙한 파리의 풍경, 호퍼의 작품 전반을 시종일관 관류하는 주인공들의 깊은 고독과 우수, 외부와 단절된 느낌, 그 경계에서 꾸준히 외부를 관찰하며 타인을 자신의 내부로 끌어들이려는 호퍼의 서툰 욕망이 느껴진다. 유독 푸른색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호퍼의 역량과, 마치 ‘흰색에도 명암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듯 그가 빛을 묘사하는 방식은 언제나 경탄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진정한 ‘빛의 마법사’이다.


시력에 대한 위기감이 지속되고 있는 이 시기에 호퍼의 전시회가 내게 선사해 준 의미는 그야말로 특별함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내게 ‘시력에의 의지’를 불러일으켰다. 아직은 호퍼의 그림들을 감상할 수 있다는 자족의 감정과 더불어, 호퍼의 그림이 불러일으키는 인간의 실존적 고독감과도 대면하게 된 시간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사랑해 온 화가의 작품 앞에서, 순간 호퍼의 연대기와 나의 연대기가 오버랩되며 펼쳐진다. 한 때 예술 작품에 내 눈과 모든 감각을 헌신했던 젊은 시절과, 그 시절의 일부를 함께 했던 파리라는 도시와, 그곳에서 실제로 마주쳤던 호퍼의 그림 속 주인공들, 호퍼의 회화와도 꽤 인연을 맺었던 나의 연구 주제들, 호퍼의 <뉴욕의 방>을 학생들과 공유하며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던 미술 강의 시간을 소환해 본다. 지금 현재의 이 모습으로 다시금 호퍼를 마주하기까지의 전 세월이 잘디 잔 물살처럼 나를 간지른다. 그의 그림들은 나에게 무엇이든 극복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반드시 이토록 훌륭한 작품들과의 또 다른 인연을 포기하지 말라고 격려한다. 


전시회에서 그림을 보던 중 자연스럽게  [Prescent.14]에서 만났던 『빛 혹은 그림자』가 떠올랐다. 마지막 산책로를 이 책으로 삼은 것도 그 때문이다. 그때 책방에서 흘러나오던 향기가 어렴풋이 코끝에 맴돈다. 나의 과거와 현재가 오감을 통해 만난다. 이 책은 내가 과거에 누렸던 산책로와 현재 오가는 산책로를 연결시키는 통로이자, 나의 가장 큰 관심사인 시각 예술과 문학에 대한 취향을 접목시키는, 마치 산길과 바닷길처럼 서로 다른 두 길을 이어주는 교차로와 같은 책이다.


기적은 결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산책하다 산 책』의 열세 번째 산책로에서 내게 이미 ‘시력에의 의지’를 선사한 바 있는 에릭 호퍼가 떠오른다. 화가였던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와 길 위의 철학자 에릭 호퍼(Eric Hoffer). 에드워드 호퍼의 서울 전시회 제목이 <길 위에서>인 것은 또 얼마나 절묘한 우연인가.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미스테리는 두 명의 호퍼가 내 생애에서 해 준 동일한 역할이다. 삶이라는 길 위를 정신없이 걷다 넘어진 내게 그들은 잠시 멈춰 서서 내 안의 풍경을 바라보라고 충고한다. 그것은 단지 시력만으로는 포착하기 힘든 풍경이라고 말이다. 


그 가르침은 오직 이 글을 함께 해 준 독자들과 나만이 공유할 수 있는 하나의 비밀이다. 나아가 책이라는 산책로가 우리에게 허락해 준 값진 유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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