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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Sep 18. 2023

평범한 사람의 일요일

또다시 주말이 끝나고 있다.

곧 월요일 자정을 맞이하는 이 시간에 조용한 거실에 앉아 주말을 곱씹어본다.

새벽엔 비가 계속 쏟아져서 수영을 가려고 눈을 떴다가 빗소리에 안도하며 다시 잠을 청했다.

이럴 거면 알람은 왜 설정한 거며 지난밤 수영 가방은 왜 챙겨놨는지.. 출근 준비하는 남편의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모른 척하고 더 자려다가 회사 앞까지 태워달라는 목소리에 박차고 일어났다.

남편은 오늘 출발하여 열흘동안 시운전을 가는데 짐도 너무 많고 비도 쏟아져서 회사 앞까지 태워다 줬다.

아빠 간다니까 아들은 문 앞에서 인사만 휙 하고 방 안으로 들어가고, 일어나서면서부터 서운해하던 딸은 두 손으로 계속 눈물을 닦았다.

익숙해질 만도 한데 딸은 여전히 서운한가 보다.

나는 익숙해졌다.

남편이 과자 사 먹으라고 내릴 때 준 이만 원이 반갑다. 오랜만에 보는 현금이다. 지갑에 넣어두면 몇 주는 쓴다.


집에 돌아왔는데 아직 여덟 시가 안 됐다. 

주말 아침은 길다.

오늘 뭐 하고 놀지? 어디 가지? 점심 저녁 뭐 먹지? 하나하나 천천히 생각해도 아홉 시 언저리다.

평일엔 가능하지 않은 마법 같은 현상이다.

평일 아침엔 머리만 감고 밥만 먹어도 출근할 시간이니까.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오늘 할 일을 생각했다.


도서관에서 하는 뮤지컬을 신청했는데 아직 승인 대기라서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되네.

마트 장보고 옆에 있는 키즈 카페에 가서 놀까? 거긴 너무 사람이 많아 별론데.

공원에서 자전거도 타고 줄넘기도 하면 좋을 것 같은데 진 자리가 많아 영 내키진 않네.

(나가기 영 귀찮네... 집에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하면서 집안일을 했다.

건조기를 열어 뜨거운 김을 빼고 며칠간 못 씻은 건조기 필터를 씻었다. 건조기 필터를 보면 인간이 먼지라는 게 명확히 드러난다. 깨끗하게 빤 옷에 무슨 먼지가 그렇게 그득그득한지.. 필터에 있는 먼지를 휴지로 한번 걷어내고 샤워기를 씻은 후 말린다.


계란프라이, 시리얼 먹고 싱크대에 가져다 둔 그릇을 씻었다. 아들 딸 사이좋게 시리얼만 건져먹고, 노른자 반은 남겼다. 어제 설거지한 그릇도 대강 말라서 싱크대 안에 밀어 넣었다.

새로 놓은 디퓨져 향기가 너무 강해서 꽂아둔 막대기를 몇 개 덜어냈더니 코에 감기는 향이 한결 편해졌다.

딸은 어지럽다고 치우라고 하지만 나는 너희들의 볼 일 후 남은 향기가 더 어지럽다.


새벽에 그렇게 쏟아지던 비가 아홉 시 쯤되니 하늘에 구름은 가득했지만 구름 사이에 파란 하늘이 보였다.

이제 하늘이 높다.


아이들끼리 노는 소리가 높다. 불안 불안하다. 너희들의 소음은 청소기로 제압하겠다!

청소기 한 번 밀고 의자에 앉아 커피를 한잔 마셨다.

같이 놀던 아이들이 이제는 따로 떨어져 있다.

각자의 공간에 침범하지 않았다.

완벽히 분리된 상태였다. 더할 나위 없었다.


딸은 그전에 만들었던 종이놀이를 갖고 혼자 붙였다 뗐다 하며 논다.

아들은 만들었던 레고를 다시 분해하고 자기 맘대로 다시 만든다. 자동차인지 헬리콥터인지 기차인지 잘 모르겠다. 조용히 만들고 있으니 더 건드리지 않았다.

나는 아이들 보면서 커피도 먹고, 학습 자료도 만들고, 리코더 연주도 했다.

십 년도 더 전에 샀던 리코더가 낮은음은 연주하기 힘든데 높음 라까지 쉽게 연주되어서 연주할 때 재미있다.  포뇨도 부르고 아이엠도 불렀다. 캐논변주곡도 부르고 슈퍼 샤이까지 완벽해!


엄마가 리코더 불고 있으니까 딸이 와서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찍었다.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되는데... 딸내미가 자신이 찍은 영상을 신나게 보여주는데 핫핑크 티셔츠 입은 쪽찐 머리의 여자가 앉아 있다.

씻어야겠다.


씻고 나서 도서관에 전화를 하니 안 오는 사람도 있으니까 미리 와서 현장 접수를 하면 들어갈 수도 있다고 한다. 혹시나 해서 아이들과 한 시간 반전에 출발해서 뮤지컬 하는 공연장에 갔다. 이미 주변 주차장은 만원이었고 조금 멀리 차를 대고 걸어갔는데 좋은 자리에 앉아서 보려는 엄마 아빠들이 아이들 손을 잡고 이미 와 있었다. 참 부지런하다. 아직 입장 전이라 준비하시는 직원 분께 여쭤보니 현장 접수는 안 받는다고 했다.

공연 관람 인원 400명 신청 완료 후 승인대기 상황으로 내 앞 10명 정도만 안 오면 들어갈 수 있었던 터라 아쉬웠다. 한 번만 더 물어보려다가 바쁜 것 같아 그냥 돌아 나왔다.


한번 더 물어볼걸.. 승인 대기 중이라는 말을 못 한 게 영 아쉬웠다. 나이 삼십 후반에도 할 말 다 못하는 성격은 고칠 수가 없다.

후회할 걸 뻔히 알면서 진상처럼 보일까 서둘러 돌아 나오는 꼴이라니..

징징 거리는 아들 소리를 모른척하며 근처 마트에 있는 키즈 카페에 갔다.

시원하다. 오늘은 여기구나. 진작 올 걸. 


아들 딸 볼풀장에서 물고기처럼 헤엄치는 모습에 아까의 불편한 후회는 금방 사라지고 볼풀 위에 끄는 썰매줄이 내 손에 남았다.


자! 이제 끈다. 나는야 루돌프. 빨간 코도 아니고 너희들은 산타도 아니지만 나는 썰매를 끈다.

휘리릭 빨리 끌어주는 아빠의 권법은 엄마의 취향이 아니라서 엄마는 어슬렁어슬렁 권법을 쓴다.

천천히 느리게 그리고 재미없게!

금방 싫증난 두 아이는 트램펄린, 두더지 잡기 하러 순식간에 사라진다.

나도 재밌어 보이는 콘솔 게임도 한번 해보고 새로 들여온 노래방에도 들어간다. 추억의 테트리스 게임을 엄마가 이 동네 끝판왕처럼 재밌게 하고 있자 우리 아이들 곁에 다가와 은근슬쩍 의자를 빼앗지만 내가 먼저 왔다. 이번판만... 한 번만 더.... 계속해서 스타트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두 아이 키즈카페 두 시간 + 음료수 1병 + 보호자 입장료 = 25000원 나쁘지 않다. 이제 1인 1 메뉴를 하는 아이들이라서 당당히 삼인분의 음식을 주문하고 내가 1.5인분을 먹었다. 기분 좋게 배불러서 마트 장을 봤다.

점심을 먹고 간 것이 신의 한 수! 추석 맞이 제수용품 및 과일, 고기 등 맛난 음식이 가득한 마트였지만 배가 불러서 딱 살 것만 사고 나왔다.


집에 오니 벌써 4시였다.

이제 시간이 제대로 흐르고 있었다.

다음 주 식사를 책임질 단짠단짠 장조림 한 냄비를 끓이니 일요일도 얼추 끝났다 싶었지만 이후의 일도 한가득이라 더 이상 구구절절 쓰고 싶은 생각이 없다.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일요일도 곱씹고 곱씹다 보니 달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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