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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Sep 13. 2023

일흔을 산다는 건

54년 말띠이신 우리 아버지의 칠순 잔치를 지난 주말에 가족끼리 했다. 말이 거창해서 칠순잔치이지 가까이 사는 친지분들과 점심 한 끼 같이했다. 그래도 칠순이신데 식사 대접 한번 해야 하지 않겠냐는 남편의 말에 생각 없이 그냥 수긍했고 아버지께 전달했더니 아버지께서 파티원(??)을 손수 모집하셨다.

같은 마을에 사는 작은 아버지네, 건너 마을 큰 외삼촌네, 조금 멀어도 같은 지역 안에 사시는 이모네와 그리고 우리 가족과 아버지까지 15명 정도 되는 인원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야 빤했다. 이렇다 할 한정식 전문 식당은 따로 없고 친정 동네에서는 외식하면 한우뿐이라서 아버지가 추천하신 고깃집으로 식당을 잡았다.


손님들도 초대한마당에 그래도 남들 하는 것은 해야 하지 않나 싶어서 칠순 들어간 현수막도 준비하고 아버지 잘 나온 사진 넣어서 감사패도 만들었다. 레터링 수제 케이크도 주문하고 지난 멕시코 여행 때 찍은 사진으로 만든 앨범도 하나 만들었다. 직접 케이크를 구운 것도 아니고 한 땀 한 땀 공을 들여 현수막, 감사패를 만든 것도 아닌데, 손으로 몇 번 검색하고 주문하는 일마저도 번거로울 만큼 생각할 것들이 적진 않았다.


토요일 점심, 약속시간보다 어르신들 서두르실게 빤해서 12시 예약이지만 미리 이동해서 현수막도 걸고 기다리고 있으니 외삼촌, 외숙모, 외사촌오빠, 이모, 이모부, 이모부네 형님분, 작은아버지, 사촌 동생, 사촌동생처(올케), 태어난 지 6개월 된 사촌동생 아들까지 속속도착했다.


식당으로 가던 중 남편이 말을 했다.

-미리 할 말 준비해 놔. 나처럼 울지 말고.

-무슨 말? 그냥 생신 축하 노래 부르고 감사패 드리면 되는데.

-말하다가 울 것 같은데?

-내가? 설마.


내가 운다고? 기쁜 날 울 일이 뭐가 있을까 싶었지만 4년 전 시아버님 칠순 잔치에 남편이 난데없이 감사패를 읽다가 눈물을 쏟는 장면이 떠올랐다. 당시 나로선 갑자기 우는 남편이 웃겨서 놀려줄 준비를 하던 차에  곁에 있던 어머님, 형님들 모두 울고 있는 모습을 보자 황급히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그때 남편이 흘린 눈물의 의미를 알게 된 것은 우리 아버지의 칠순에서였다.


 손님들이 모두 모여 아버지의 생신을 축하드리고 우리 딸과 아들이 제일 목청 크게 생신 축하노래를 부른 후 아버지께 드릴 감사패를 읽는데 처음에 밝았던 목소리와 달리 끝으로 갈수록 목이 메어갔다.

감사패에 담긴 문구가 너무 감동적이어서?

업체에서 주문 제작한 감사패라서 내가 따로 문구를 손댈 필요도 없이 절절이 감동적인 문장으로 구성되었기에 그저 생각 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그 말들이 어쩜 그리 내 마음을 잘 담아냈는지 명문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진짜 감동적인 것은 일흔을 살아온 아버지의 인생 그 자체였다.

아버지의 인생을 한 푼어치나마 알고 있는 사람이어서일흔을 살아온 아버지의 인생으로 인해

나와 내 가족이 존재할 수 있다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에 대한 감사함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평생 밭에서 일만 하신 아버지께선 이제야 조금 일에 대한 욕심을 놓으시고 좋아하는 것(주식 투자, 유튜브 검색, 쇼핑)을 하는데 재미를 붙이셨다.

아버지랑 이야기할 때면 팔 할이 주식 아니면 내년 농사짓기 싫다는 말씀이다.

용돈을 더 드릴 것도 아니지만 일 그만하시라고 말씀드려도 다음 해 봄이면 다시 일을 시작하시는데 아들 딸 다 키우고 시집장가보낸 후 손자 손녀까지 얻으신 일흔의 아버지가 더 일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게 의아할 정도이다.


농촌에선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면 그대로 돈이 된다.

산증인이 우리 아버지다.

3월 농약사에서 씨앗 품종 카탈로그를 몇 권 가지고 와서 그해 심을 작물을 정하는 것부터다.

겨우내 묵혔던 땅을 트랙터로 갈고 비료나 거름을 뿌린다. 로터리로 밭고랑을 만들고 멀칭 비닐을 씌운다.

멀칭 비닐에 구멍을 뚫고 봄배추, 무부터 심고 나면 논에 물을 대고 모내기를 한다.

모내기가 끝날 때면 미리 포트에 심어둔 오이와 박이 얼추 모양을 잡는다.

오이 모종이 어느 정도 자란 다음 오이 모종에 박을 접목하는 것은 5월쯤이다. 마을에 오이 작목반이 있어 양이 많을 때면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하지만 우리 엄마 아빠는 남의 집에 일하러 갈 짬이 없어 2000-3000개가 넘는 오이 모종을 모두 손수 접목하셨다. 나도 옆에서 오이 모종이나 박 모종 접 붙일 곳을 자르는 일을 많이 거들었다. 첫 오이는 항상 여름 방학쯤 출하했던 것 같다. 여름 방학 동안 집에서 오이 상자를 접는 일, 아버지가 차에 실어 오는 오이 상자를 창고에 내리는  일등은 동생과 내가 거들었다.

뜨거운 여름 열기를 피해 새벽이슬을 맞아 따온 오이엔 이슬이 묻어 있었고 오이 가시 하나하나 성글어 있는 이슬은 따가웠다.


여름엔 오이뿐 아니라 벼가 자라고 있는 논에 호스를 끌어가며 제초제를 뿌리고 호박을 따서 출하하기도 했다. 주로 오이를 많이 심으셨지만 한참 동안 수박 농사도 지으셔서 비올 때면 하우스를 내리러 먼 하우스까지 왔다 갔다 했다.

그렇게 여름방학이 끝나고 추석이 다가올 즈음이면 밭 주변 사과와 대추 호두가 익어서 사과도 따러 가시고 대추, 호두도 가득 털어 오셨다. 그리고 가을 농사 시작이다.

가을엔 무와 배추, 양배추를 주로 하셨는데 오이를 다 따내고 오이 덩굴을 치워낸 자리에  김장 배추 모종과 무씨를 심었다. 그 이후엔 겨울에 출하할 양배추는 하우스에 모종을 옮겨 심었다. 추석도 지나고 동네엔 구수한 나락 말리는 냄새로 가득했지만 우리 집은 벼 나락을 말리는 일은 하지 않고 타작하면 바로 팔았다. 가을 채소 농사도 바빴기 때문이다. 그렇게 눈이 내릴 때까지 일을 멈추지 않으셨다.


할 일 총량제가 있다는데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이미 해야 할 일을 모두 하셨고 그 한계점도 넘으셨을 것 같다. 여름이면 까맣게 그을린 얼굴로 새벽 1-2시에 헤드랜턴을 머리에 차고 밭으로 오이를 따러 가시는 아버지가 안타깝기도 하고 답답해서 짜증스럽기도 했다. 내가 도울 수 없고 내가 할 수 없어 미안한 마음이었던 것 같다. 다행스럽게 농작물 가격이 좋을 때면 그런 노력이 헛되지 않았지만 가격 폭락이나 태풍, 집중 호우 같은 자연재해, 병충해 등으로 기껏 지은 농사를 망칠 때면 집안 분위기도 같이 어두웠다.

한여름 땡볕 아래 1-2분만 있어도 어질어질할 텐데 점심 먹고 한숨 자고 나면 다시 밭으로, 논으로, 하우스로 나가셨다. 징글징글하게 일만 하던 삶을 곁에서 봤던 내가 어떻게 고맙지 않을 수 있을까.


노인 인구가 많아 아버지 나이면 동네 회관에서 제일 어리다고 하셨다.  하긴 내가 어렸을 때도 할머니였던 분들이 여전히 살아계신다. 일흔이 막내인 그 동네에선 축하받기 민망한 나이일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아버지의 일흔은 존경하는 마음을 표현할 수 있어서, 챙겨드릴 수 있어서 고마운 나이이다.

아버지의 일흔 번째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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