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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Oct 06. 2023

또다시 순천

연인에서 가족으로

남자와 여자에 관한 보통의 연애 이야기로 시작하자.

만난 지는 몇 번이지만 아직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하지 못한 채 주말이 되었다. 서로 바빠서 얼굴만 두어 번 보고 연락만 주고받는 요즘 말로 썸을 타던 시기였다.

토요일 오후 남자는 여자가 퇴근하기를 기다렸고 여자는 설레는 마음으로 약속 장소에 나갔다.

어디를 갈 거냐는 여자의 말에 남자는 꼬깃꼬깃 접힌 종이를 편다.

그날 갈 곳과 여정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남자와 여자가 처음 데이트를 한 곳은 순천이었다.

사람이 많았고 이제 가을이 시작되고 있었고 하늘이 높고 파랬다. 순천으로 향하던 차 안의 공기가 선명했고 시간은 더디 흘렀다. 이야기는 조잘조잘 끊어지지 않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서먹했던 것은 아직 사이가 분명하지 않아서였을까


여자가 물었다.

-우리 지금 사귀는 사이예요?


남자가 당황하며 말했다.

-그러니까 제가 저녁에 뭔가 말하려고 했는데요.

 

자동차는 둥실 대며 순천만에 도착했다. 비교적 늦은 오후였지만 사람들로 북적였다. 갈대밭 가운데로 난 좁은 통행로는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과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로 구분되어 이동했지만 처음 데이트하는 그 두 사람은 옆으로 나란히 갔으므로 옆 사람들과 어깨가 부딪쳤다. 자연스럽게 어깨가 맞닿게 되고 두 사람의 거리는 더 좁아졌다.




 길었던 추석 연휴가 끝나고 10월 2일.

집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남편 집과 우리 집을 왔다 갔다 하기만 해서 길었던 휴일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어차피 다음날도 개천절이라 하루 더 여유가 있어서 순천에 가기로 했다. 전라남도 순천시는 나에게는 의미가 있는 장소다. 24살에 친구와 처음 같이 갔던 장소이기도 하고 첫 아이가 태어난 후 셋이서 처음으로 여행을 간 곳이기도 했다. 혼자 기차 여행을 했을 때 순천만 갈대밭을 갔던 날은 십여 년이 흐른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재작년 첫째 아이의 생일을 기념해서 순천에 가기도 했다.  어느 가족이나 그 가족에게 특별한 장소가 있기 마련인데 나에게는 순천이 그렇게 마음에 남는 곳이다.


 이번 순천 여행은 긴 연휴 끝에 가족끼리 나들이 겸 만난 지 12주년을 나름 소소하게 기념하는 여행이라고 나 혼자 생각했다. 추석이 지나고 나서 날씨가 급격하게 추워졌기에 아침에는 든든하게 차려입고 차에 탔다. 아침 기온이 벌써 10도 안팎으로 서늘한 기운이 가득했다. 그러나 오전으로 갈수록 하늘도 더 맑아지고 햇살도 강해서 여느 여름과 비슷할 정도로 기온이 상승했다. 순천에 도착하니 오전 11시가 조금 안된 시각이었다. 아들은 입고 있던 두꺼운 티셔츠를 바로 벗어던지고 딸도 잠바를 벗었는데 나는 도톰한 니트를 계속 입고 돌아다녀야 했다. 물론 아이들이 벗은 옷은 내가 들고 다녀야 했기에 날씨가 더욱 힘들게 느껴졌다. 그래도 맑은 하늘이 더욱 높아져서 가는 걸음은 가벼웠다.

 순천은 전남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곳인데 요즘은 순천국제정원박람회가 열리고 있어서 더욱 많은 사람으로 붐볐다. 처음엔 순천만 갈대 습지에 갈까 하다가 아직 더워서 갈대밭을 걸어 다니다가 기절할 것 같은 예감에 순천만 국가 정원으로 방향을 정했는데 이곳도 만만치 않았다. 들어가는 IC부터 차가 막히더니 겨우 5킬로 가는데 삼십여분이 흐를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아무래도 추석 연휴가 길다 보니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나 보다. 여차저차해서 주차를 한 후 길게 늘어선 사람들을 따라 국가 정원에 들어갔다.



 2년 전에 왔을 때보다 사람들이 많은 것은 물론이었지만 국제 정원 박람회에 걸맞게 세계 각국의 정원이 더욱 다채롭게 꾸며졌다. 그동안 갔었던 중국 정원, 프랑스 정원, 네덜란드 정원 말고도 이번에 새로 생긴 곳은 한국 정원과 멕시코 정원이었는데 특히 멕시코 정원에 사람들이 많았다. 멕시코 특유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게 꾸며졌고 특히나 커다랗게 자란 용설란이 여기저기 많이 자라고 있어 순간 멕시코에 온 듯했다.

많이 걸어서 가장 안쪽에 있던 한국 정원 역시 이번에 새로 생긴 곳이었다. 한국 정원은 예전에 가본 담양의 소쇄원 하고 분위기가 비슷했다. 우선 보이는 곳은 창덕궁의 아름다운 부용정과 부용지를 모티브로 한 정원이었는데 작지만 부용정 위에 있는 어수문도 비슷하게 만들어 두어 보는 재미가 있었다. 계단을 오르면 둥그런 달처럼 보이는 대문이 나오고 그 안에는 옛 선비가 걸었음직한 고요하고 고즈넉한 누각이 나와서 쉴 수 있었다.

 마루에 걸터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니 나도 나만의 정원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정원에 앉으면 세상의 고민을 다 내려놓고 푹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참 많이 걸었고 많은 말을 했지만 생각나는 것은 순천은 또다시 오고 싶은 곳이라는 생각뿐이다. 다시 온 이곳에 그전에 쌓였던 추억에 덧붙여 새로운 이야기를 남길 수 있어서 좋았다. 한 장소가 사람에게 주는 의미는 고향처럼 태어나고 자라면서 살게 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곳도 있지만 자주 가고 추억을 남기며 자신만의 특별한 장소가 될 수 있다. 앞으로 살면서 더 많은 곳을 돌아다니게 될 텐데 나는 어떤 곳에 또 추억을 남기게 될까?


다시 처음의 연애 이야기로 돌아가자. 순천만 갈대밭을 지나 용산전망대에 오르고 있었다. 이전에 혼자 여행했을 때나 친구와 갔을 때는 오르막이 심한 전망대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그날은 왠지 그곳까지 가게 되었다. 점점 거리가 좁아지던 그 두 사람은 오르막길에서 여자가 먼저 남자의 가방 끈을 부여았고 남자는 그 틈에 여자 손을 잡는다. 그렇게 두 사람의 연애가 시작되었다.  그날이 10월 2일이었고 저녁 식사를 하면서 남자는 한번 만나보자는 이야기를 참으로 힘겹게 꺼냈다. 그로부터 3년 후 결혼을 하였으며 현재는  두 아이와 복작복작 살게 되었다는 흔한 연애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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